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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 정  &  엄 경 환

Solo 

2023. <연결된 풍경> 대추무파인아트, 강릉

2022.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 고성평화지역 아트센터, 고성

2021. <숨>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0. <서울의 건기> 사이아트 도큐먼트, 서울

Group

2023. <속깊은 마을, 살펴보는 마음> 속초시 수산물 공동할복장, 속초

2023. <속초아트페어> 칠성조선소, 속초

2022. <속초아트페어> 칠성조선소, 속초

2021. <snu villa d'art> 예술의 전당, 서울

2021. <겨울 속 봄바람이 머무는 자리> 분당 서울대병원, 경기

2020. <B-side> 스페이스 오뉴월, 서울

수상 및 기타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청년예술가 생애 첫지원사업 선정

2023. 강원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지원사업 선정

2020. 그림책 <공허인> 출판

2019. 그림책 <반쪽인간> 출판

 김소정, 엄경환은 부부 작가로 우리 주변의 자연과 인간의 삶 속에서 남겨지고 사라지는 흔적들을 추상적 풍경으로 표현합니다. 남겨져있는 것들의 흔적과 더불어, 사라진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의 중첩을 통해 언젠가 사라질 존재인 우리의 삶의 의미를 더 큰 자연의 생명 속으로 연결하고, 시간의 연속성 위에 서있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그립니다. 2022년 강원도 고성으로 이주한 둘은, 절반은 외지인의 시선으로, 절반은 주민의 시선으로 이곳의 자연과 삶을 바라봅니다. ‘연결된 풍경’ 전시에서는 바다와 가까운 고성의 삶의 양식인 어업과 관련된 그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생동감 있게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평생의 노곤함과 성실함이 녹아있는 생활 곳곳의 흔적들을 그려질 풍경 속에 표현하고자 합니다. 대자연 속 인간의 작음이 아닌, 자연과 지금 현재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곳의 사람들의 삶 또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관객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잃어버린 감각을 찾아

김소정X엄경환, 《연결된 풍경》, 대추무파인아트, 2023.09.01.~09.30.

/ 한승은, 문화예술 연구자

 

 

 ‘연결된 풍경’은 지도다.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으로는 바다, 다른 한쪽으로는 솔밭이 펼쳐진 풍경을 떠올려보자. 백사장 한구석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두 사람이 나타나 바위 위에 한지를 얹고 물을 뿌린 다음 먹이 배어나는 천 주머니로 문지르기 시작한다. 바위의 결과 굴곡을 본뜬 뒤, 둘은 백사장을 가로지른다. 모래 위에는 휴식 중인 그물이 놓여 있고, 이들은 그물 위에 다시 한지를 펼친다. 그물의 모습과 질감을 본뜬 다음에는 솔밭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번에는 나무줄기에 한지를 대고 먹을 문지른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수피(樹皮) 무늬가 생겨난다. 이제 바위와 그물과 나무가 검게 밴 종이를 잘 말릴 차례다. 종이가 잘 마르면 그 위에 붓질을 시작한다. 작업실에 그림을 걸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때 작업하기도 하며 화면을 생생하게 채워 나간다. 바닷가, 숲, 작업실을 오가는 동선, 하얀 종이 위에 바위와 그물과 나무가 묻어나는 동선, 종이 위로 두 사람의 네 손이 움직이는 동선. 이 모든 동선이 연결된 풍경을 이루고, 연결된 풍경은 지도가 된다. 일반적인 지도의 기능은 목적지를 잘 찾아가도록 돕는 데 있다면, 두 작가가 그리는 지도의 효능은 감각을 찾아가는 데 있다. 김소정과 엄경환의 눈길, 발길, 손길에 스친 자연은 잠든 감각을 깨우고, 깨어난 감각은 다시 자연을 향한다. ‘연결된 풍경’은 그렇게 잃어버린 감각의 길을 되짚는 지도다.

 오감의 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 폴이 보리수 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기억의 문이 열리는 장면으로 자주 오르내린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맛과 향은 감각의 놀라운 기억력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감각은 잃어버린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에 충분한가. 다시 말해,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분명,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지만, ‘그렇다’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전 잃어버린 감각부터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김소정과 엄경환은 시간을 그린다. 바닷가라는 큰 풍경을 이루는 작은 풍경들인 바위와 그물과 나무 위에 한지를 얹고 먹으로 그 실물을 본떠 시간을 기록한다. 이렇게 탁본에 서린 촉감은 시간을 더듬는 손이 된다. 매일 얼굴을 씻고 젓가락을 쥐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익숙하고 무신경한 촉감은 탁본을 눈으로 더듬으며 탁본을 뜨는 작가의 손을 떠올리고 바위와 그물과 나무의 질감을 상상하는 동안 신선하고 생경한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답답한 빌딩숲에서 탁 트인 바닷가로 이주하며[1] 갱신되었을 삶의 감각은 그렇게 시간의 문을 여는 감각이 되고 타인의 감각을 깨우는 감각이 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 기억하는 것은 시간을 되감아 재생하는 것. 재생 버튼을 누르듯 손이 닿는 감각을 되찾는 데서 이 모든 것이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고, 코를 막으면 맡을 수 없고, 먹지 않으면 맛볼 수 없고, 만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눈을 떠야 주위가 보이고 귀를 열어야 소리가 들리고 숨을 쉬어야 냄새 맡고 뭔가를 입에 넣어야 맛을 느끼고 살갗을 어딘가에 닿게 해야 촉감이 전해진다. 감각은 능동적이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촉감이 일어나는 것은 수동적이지만, 보아야 보이고 들어야 들리고 냄새 맡아야 냄새나고 맛을 봐야 맛이 나고 만져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이 능동적이라는 것은 수동성을 배제한 능동적임이 아니다. 감각은 열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은 능동과 수동의 사이에서 작동한다. 감각은 자연스럽게 열린다.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하면 내 몸을 드나드는 바람이 새롭고, 어지러운 시선이 정돈되고, 소음에 둔해진 청각이 느끼기 시작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에서 바람에 실린 바다 내음을 맡으며 수평선에 시선을 던진 채 파도 소리를 듣다 보면 포말처럼 하얀 소금의 맛이 혀끝을 맴돈다. 감각이 열리는 곳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조금은 먼 곳이다. 그곳은 저마다 때마다 다르겠지만, 울창한 숲이나 넘실대는 바다와 같이 드넓은 자연은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 생생함에 못지않은 아득함을 일깨운다. 생생하면서도 아득한 자연이 여는 감각의 문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열어 보인다. 사람에게 깃든 총천연색 자연이 드러나는 모습은 살아 있는 감각의 향연이다. 자연과 사람이 교감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사람의 감각들이 서로 고양되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곧 감각의 문 너머 걸어가는 감각의 길이다.

 

 공감각의 힘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보통 오감으로 구분되는 감각은 서로 섞이며 공감각을 이룬다. 미술은 시각예술이지만 보는 일은 단지 보기만 하지 않는다. 전시공간에서 작품을 둘러보는 움직임은 우선 촉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움직이며 공간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듣고 맡고 맛보는 일을 배제하지 않는다. 전시공간에서 들리는 것은 작은 발소리와 조용한 속삭임뿐이고, 맡을 수 있는 것을 명명하자면 대개 무취에 가깝고, 맛볼 수 있는 것이라면 또한 무미일 따름이라고 느끼는 것은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실에 숨은 비범한 사실이 있다. 느낄 수 있는 것과 느껴지지 않는 것의 경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고, 감각을 깨우는 자극의 강도는 광범하면서도 미세한 스펙트럼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김소정과 엄경환의 작업은 감각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그 넓이를 메우는 결은 얼마나 촘촘한지 일깨운다. 이들의 그림을 보면 바위와 그물과 나무의 감촉이 느껴지고 바다와 솔숲 내음이 감돌고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입속으로 상쾌한 맛이 밀려든다.

시각이 여는 감각의 문은 촉각이라는 통로로 나 있다. 촉각은 청각, 후각, 미각이라는 세 갈래 길이 모인 교차로와 같다. 소리도, 냄새도, 맛도 모두 접촉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은 청각과 후각, 그리고 미각을 한꺼번에 불러낸다. 바위와 그물과 나무에 한지를 덮고 먹으로 찍어낸 바탕에 분채로 채색한 풍경은 보자마자 탁본을 찍는 손에 전해오는 바위와 그물과 나무의 감촉을 전한다. 그 감촉은 곧 신비한 색감의 조개를 귀에 대면 들리는 파도 소리, 바닷가에 부는 바람에 실린 바다 내음을 상기시킨다. 감각의 문을 열고 문밖 통로를 따라 나아가는 길은 시간의 길을 더듬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의 나이테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처럼, 조개껍질에 새겨진 무늬는 조개가 자란 시간과 조개가 살던 바다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끝까지 아름다운> 연작).

두 작가가 야외에서 그린 그림(<살랑>, <물결>, <솔밭산책>, <파광> 연작 등)은 그림을 그린 시간의 현재를 담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필사적으로 포착하려 한 인상파 화가처럼 눈앞의 눈부신 풍경을 담지 않을 수 없는 두 사람은 형형색색으로 찬란한 빛을 표현한다. 곧게 뻗기도 하고 구불구불 춤추기도 하고, 서서히 스며드는 듯 은은하기도 하고 단단히 맺힌 듯 도드라지기도 하는 선과 점들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사람은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서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 이미지는 섬세한 실사(實寫)일 수도 있고 그로부터 추출한 간결한 형식일 수도 있다. 김소정과 엄경환의 그림은 섬세한 실사의 실상을 연상시키는 한편 간결한 형식의 후광을 내비친다. 쉴 새 없이 반짝이고 한없이 푸른 자연에서 나온 그림들은 한결같은 데가 있다. 형형색색으로 찬란한 빛은 언제나 눈이 부시다. 그리고 눈부신 만큼 따스한 빛은 움츠린 몸을 펴고 닫힌 감각을 연다. 눈앞의 풍경에서 출발한 그림이 감촉과 소리와 냄새와 맛을 불러낸다. 자연은 공감각의 총체다. 그리고 자연을 그린 그림 또한 공감각의 총체다.

 

 교감의 힘

 세상은 넓은 공간과 오랜 시간이다. 세상에 왔다 가는 한 사람의 일생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이다. 자연은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자연의 세월은 길고 길어, 그 오랜 시간이 간단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티끌만 한 삶을 살고 죽는 인간에게 아득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부단한 시간을 흘러온 자연의 파노라마는 변화무쌍하면서도 한결같다. 세대를 거듭하며 생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 개체는 서로 다르지만 이들이 자연에서 느끼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 역시 자연의 변함없는 일면 때문일 테다.[2] 사람은 잊히고, 잊히는 사람과 함께 그가 기억하는 자연은 잊히지만, 생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기억하게 될 자연은 의연히 자연의 세월을 잇는다. 김소정과 엄경환의 작업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까닭과 소중해서 온기가 느껴지는 까닭 역시 잠시라면 잠시일 인생을 자연의 쉼 없음 가운데서 길어내고 기억하려는 인간적인 노력 때문일 것이다.

그물은 바다를 거르고, 그림은 그물을 거른다. 그림이 거른 그물은 그물이 있던 흔적이다. 그물이 바닷속에서 흔들린 흔적, 펄떡이는 생명을 실은 흔적, 육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한 흔적. 사람의 손이 그림으로 거른 이 모든 흔적은 먹빛으로 종이 위에 남는다. 오랜 시간에도 쉬이 변치 않는 한지에 먹빛으로 남은 그물의 흔적은 그렇게 시간의 층이 겹겹이 스민 그림이 된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잇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다. 한 사람의 삶은, 비유하자면 시간의 길 위에 놓인 짧은 나뭇가지 하나. 미래의 한때가 현재의 한때가 되고 다시 과거의 한때가 되는 짧디짧은 시간을 겪을 따름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삶은 그 짧은 마디가 그물코처럼 엮인 그물이 되어 시간의 길 위에 긴 그림자를 그린다. 그리하여 기억을 기록하고 기억을 환기하는 흔적은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며 그림이라는 그물에 걸린다.

풍경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풍경의 한 장면은 다른 장면의 이면이다. 여러 사람의 삶이 수많은 그물코로 이루어진 그물과 같듯, 장면들도 그물처럼 엮인 풍경이 되어 파도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한편 바닷가로 밀려와 백사장에 펼쳐진다. 사람이라는 풍경이 연결되듯, 사람의 눈이 닿고 손이 닿은 곳곳이 연결되는 풍경. 그렇게 살아가는 흔적은 작은 그물코마다 걸린다. 그물 저편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그물 이편으로 걸려든 것들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 되고, 이 풍경은 시간의 길을 따라 한없이 펼쳐진다.

<연결된 풍경>은 먹으로 그물을 탁본한 비단이 겹겹이 걸린 설치 작업과 전시공간의 통창 밖으로 보이는, 밧줄에 그물과 비단을 빨래 널 듯 걸어 놓은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비단은 값비싼 고급 천이다. 그물코가 아주 작으면 곧 비단처럼 고운 천과 다름없지 않을까. 어부인 아버지를 보며 삶의 가치를 생각한 두 작가는 그물과 비단이 다르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수십 장의 비단에 그물을 탁본했고 그 비단을 겹겹이 걸었다. 한지에 탁본한 그물도, 비단에 탁본한 그물도 모두 탁본 특유의 아련함을 띠고 전시장의 시간을 뒤로 돌려놓는다. 바닷속에 던졌다가 끌어올리는 그물, 밤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 밝힌 환한 조명, 그물에 걸려 펄떡이는 생명.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풍경이 탁본처럼 아득하게 떠오른다. 그물에 걸려 이편으로 넘어오는 것들과 걸리지 않아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들이 있듯 탁본으로 찍어낸 것과 찍히지 않은 것이 있다. 그려지는 것과 그려지지 않는 것이 있고, 느껴지는 것과 느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감각이 열리는 만큼 남는 풍경은 아직 감각되지 않은 풍경을 배경 삼는다. 전시장 밖, 풀밭 위에 설치한 밧줄과 밧줄에 걸린 그물과 비단, 밧줄이 끝나는 지점에 놓인 그물은 풀밭을 바다로 만든다. 풀밭이 바다가 되는 감각이 열리는 만큼 남는 풍경은 밧줄이 끝나는 곳 저편을 배경 삼고, 더 멀리 연결되는 풍경의 잔상을 남긴다. 한계가 없는 풍경은 없다. 풀밭의 끝에 밭이 있고 밭의 끝에 집이 있고 집 지붕 끝에 산이 있고 산 정상의 끝에 하늘이 있다. 솔밭의 끝에 백사장이 있고 백사장의 끝에 바다가 있고 바다의 끝에 하늘이 있다. 우리는 수평선과 지평선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밧줄을 붙잡고 걸음을 디디듯 지평선과 수평선을 따라 둘러보는 풍경은 너무나도 넓다. 풀밭 너머 밭이 있고 밭 너머 집이 있고 집 너머 산이 있고 산 너머 하늘이 있다. 솔밭 너머 백사장이 있고 백사장 너머 바다가 있고 바다 너머 하늘이 있다. 한계가 없는 풍경은 없지만, 감각이 열리는 만큼 남는 풍경에는 한계가 없다.

 

 공감의 힘

 김소정과 엄경환은 함께 작업한다. 이들의 공동 작업은 탁본을 뜨고 채색을 하는 전 과정에 해당한다. 김 작가는 차분하고 섬세하다면, 엄 작가는 활기차고 과감하다(<대화>, <흐름> 등). 그렇다면 서로 다른 작업 방식이 이룬 조화의 동력은 무엇일까. 서로 어긋나다가도 결국 만나지 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라는 사실이 둘의 공동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작품이 품고 있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따로 또 같이 그려나가는 그림은 같은 이야기에 반응하는 서로 다른 감각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공감의 힘을 발산한다. 서울에서 만나 함께 작업하며 부부가 된 김 작가와 엄 작가는 끝없는 욕망과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대도시에서 더는 시달리고 싶지 않았고,[3] 엄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로 이주했다. 어부인 아버지의 삶에서 빛나는 가치를 발견하는 작가들은 그물이 비단보다 못하지 않으며 둘은 오히려 닮았다는 데 착안한다. 넉넉한 한편 막막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살아낸 흔적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한 흔적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둘의 공동 작업을 이끄는 동력이다. 두 작가의 뜻이 모이고 손이 모인 곳에서 살아 숨 쉬는 감각의 향연은 이렇게 이야기를 품고 관객 앞에 선다. 그리고 이야기가 축적되고 숙성되는 시간의 길을 더듬어 관객이 도달하는 곳은 오감이 서로 어우러지는 공감각의 현장이다. 놀랍게도, 작품의 제목을 몰라도 작품의 감각을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감각을 곧이 표현하는 언어는 사실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말없이, 눈에 보이고 살갗에 닿고 귀에 들리고 콧속에 스며들고 혀끝에 남는 감각은 곧 말 없는 이야기다.

여럿이 팀을 이뤄 협업하는 작가는 많다. 그러나 한 화면에 함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협업 구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작품의 규모가 워낙 커서 창작 과정에 여러 명의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이나 수많은 조수를 거느린 작가의 작업처럼 한 작가의 아이디어를 수행하는 데 다른 작가나 작가 지망생이 동원되는 작업은 차치하고, 뜻을 모은 여러 작가가 콜렉티브를 구성하고 작업하는 경우 대개 설치미술이나 영상,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다수의 아이디어를 버무려 한데 구현하기에는 설치미술이나 영상, 퍼포먼스가 회화보다 수월하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 회화라는 매체로 꾸준히 공동 작업을 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김소정과 엄경환은 한 화면에 함께 그림을 그린다. 이들이 그린 그림은 두 사람이 함께 그렸다는 데 ‘과연 순조로웠을까’라는 우려가 없지 않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큼 조화롭다. 다만, 조화롭다고 해서 단조롭거나 심심하지 않다. 단조롭거나 심심하지 않으면서 조화로운 감각이 전시장에 걸린 모든 그림에 공통된다. 이렇게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이야기에 있지 않을까. 둘은 자본주의의 악순환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서울에서 고성으로 이주했고, 비단보다 고운 그물의 삶과 비단보다 값진 어부의 삶에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공통된 이야기가 서로 다른 붓질과 색감으로 표현되고, 그 그림은 닮음과 다름이 조화로운 이야기를 자아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4]이고,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5]이라면, 김소정과 엄경환의 이야기는 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 즉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으로, 사랑의 표현일지 모른다.

감각은 기억을 불러내는 한편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기억이 되살리는 감각은 감정을 수반한다. 그 감정을 나눌 때 공감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6] 김소정과 엄경환은 지금 함께 만들어나가는 기억을 공유하며 그 기억에 힘입은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이 자극하는 감각은 두 작가가 꾸준히 협업하는 동력으로서의 감정을 담는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림 앞에 선 관객에게 또 다른 감정으로 스며든다. 두 작가는 그물의 감각과 감정을 공감한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차가운 바다의 품’에서 ‘사랑’을 느낀다.[7] 차가운 바닷속으로 깊이 던져졌다가 뜨거운 손길로 끌어올려지는 그물처럼, 우리는 냉혹한 세상의 한기에 당황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온기에 감동하며 살아간다. 눈과 손으로 그물과 나무를 더듬는 감각은 온몸으로 퍼지고, 그 온기는 접촉에서 비롯한다. 접촉은 공감의 바탕이고, 사랑의 시작이다.

 

 힘의 감각

 김소정과 엄경환의 그림에서 느끼는 힘은 오감, 공감각, 교감, 공감의 힘이 서로 어우러지며 일어난다. 다채로운 색감은 사람에게 깃든 총천연색의 자연을 드러내고, 과감한 한편 섬세한 붓질의 흔적은 자연 ‘앞에’ 서 있으면서 자연 ‘속에’ 서 있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낸다. 사람이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 앞에 있는 상태는 자연에 녹아들 듯하면서도 녹아들지 않고 자연을 느끼는 나의 감각을 실감하고 감탄하는 살아 있는 상태다. 이 생생함은 거세게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나지막이 약동한다. 약동하는 힘이 꿈틀대는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각은 이내 다른 감각을 깨운다. 깨어난 감각들이 섬세하게 또는 과감하게 상호작용하며 빚는 힘은 고성의 자연에서 자연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두 작가에 대한 공감으로 화한다. 숲은 숲이요, 바다는 바다다. 있는 그대로 거기 있었고 여기 있는 자연에서의 오랜 삶은 그 바통을 두 작가에게 넘겼고, 둘은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하면서도 변치 않은 자연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에 나섰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자연에 속한 인간의 모습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띤다. 두 작가의 작업 영상을 보면, 마치 무인도에 홀로 남아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고 불을 피워 물을 끓이듯, 너른 자연의 품속에서 조용히 일상을 수행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띈다. 바위나 그물이나 나무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거나 눈에 담긴 자연의 풍광을 그리며 나의 눈길과 발길, 손길에 닿은 자연을 담아내는 일에 몰두하는 두 사람은 드넓은 백사장에 숨은 작은 조개껍질처럼 작다. 이렇게 작은 사람이 큰 자연을 받아들일 때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힘을 보여주는 그림들은 잔잔한 파도 같다가도 몰아치는 파도처럼 일렁이고, 여름날 햇살처럼 환하다가도 겨울날 그늘처럼 먹먹하다. 물살 따라 춤추는 그물이 비단보다 값진 까닭은 그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손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 손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 손으로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린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말없이 우리를 흔든다.

바위와 그물과 나무를 본뜬 그림은 채색 작업으로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마치 나침반처럼, 앞으로 붓이 나아갈 방향을 안내한다. 이러한 한편 탁본은 그림의 시간을 뒤로 돌린다. 오랫동안 바람을 맞으며 닳는 만큼 견고해진 바위의 시간, 오랫동안 바닷속과 육지를 오가며 더 튼튼해지는 한편 낡아간 그물의 시간, 오랫동안 더위와 추위를 오가며 물과 햇빛을 받아 자란 나무의 시간을 되도록 오롯이 담고 싶은 작가의 마음은 탁본 작업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을 품은 그림의 바탕은 단단하고 든든한 땅이 된다. 그 땅 위에 그려나가는 그림은 변화무쌍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듯 다채롭고 싱싱하면서도 소박하고 점잖다. 우리가 모르는 시간, 잃어버렸다고 해도 틀렸다고 할 수 없을 시간을 기억하고, 그 시간의 연속인 현재를 기록하는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동적이고, 어두우면서도 밝고,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시간의 양태, 명도와 채도, 그리고 무게를 느끼는 감각이 돌아온 것을 문득 알아차리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감각을 잃어버렸나. 그림 앞에서 감각이 열리며 얻는 답은 다소 비약적이다. 우리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렇게 이런 까닭으로 감각을 되찾는다고. 감각을 잃어버린 일보다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걸, 그리고 되찾은 감각을 다시 잃지 않는 일은 더욱더 소중하다는 걸 우리의 감각은 이미 알고 있다.

 

[1] 김소정, 엄경환 작가는 지난해 서울에서 강원도 고성으로 이주했다.

[2] “가장 신기한 것은 감각의 지리적, 문화적 양상이 아니라 시간적 양상이다. 감각은 우리를 과거와 밀접하게 이어주는데 이는 아무리 주요한 사상도 수행할 수 없는 일이다.”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작가정신, 2023. p. 9.

[3] “삶의 길 위에서 누구나 다 느끼고 있을 메마름과 공허함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였다. 결국 돈에서 메마름이 온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 그것이 공동의 선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또한 이를 교묘한 방법으로 유도하는 자본가들, 돈에 감정을 섞고 달콤한 거짓으로 토핑하는 거리들. 거대한 함정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걸려들기를 아주 달콤하고 매혹적인 방법으로 기다린다.” 김소정X엄경환 작가의 작업노트.

[4]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p. 13.

[5] 위와 같은 책, 같은 쪽.

[6]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나를 숨 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0, p. 48.

[7] “차가웠다. 바람도 나를 맞이하는 바다의 품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어둡기만 한 그곳에 희망이라는 작은 온기를 담아 나를 깊이깊이 내려보낸다. 그렇게 깊이깊이 가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것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를 깊이깊이 내려보내고 또다시 건져 올린다. 어느새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움에서 왔던 그 두려움은 사랑으로 바뀌어있었다. 나는 보지 못하지만 깊이깊이 있는 곳의 눈들은 안다. 나의 온기를 담아 내린 그물은 비단과 같다는 것을.” 김소정X엄경환 작가의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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