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구지난설 (一口之難說) - 이상향을 그리다
"어디에 살아야 할 것인가?"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던져온 질문이며,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고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 여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중환의 시선은 단순히 땅의 비옥함이나 자연 경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발품을 팔아 직접 만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상향의 조건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삶의 방식과 그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번 전시는 <택리지>에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인 ‘일구지난설’에주목했다. 이는 단지 지리적, 물리적 조건을 넘어,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다양한 공간에 깃든 가능성과 한계를 이야기한다. 이중환이 전국을 유랑하며 만난 사농공상의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민초들의 꿈과 고뇌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이상향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일구지난설’의 의미를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향을 시각화한다. 작품들은 지역적 정체성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의 삶의 다층적 조건을 포착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의미를 확장한다. 어떤 작품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바라보는 한편, 또 다른 작품은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일구지난설’의 현대적 해석을 제안한다.
이중환이 탐구한 유토피아는 고정된 형태나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이상향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조건과 개인의 세계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상향일 것이다. <택리지>에서 그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삶의 조건에 맞는 터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이상적인 공간과 방식을 찾아갔다. 즉, 유토피아는 단순히 한 곳에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다층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가 던지는 질문은 이상향이 고정된 곳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제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발견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박 연 후
성 상 식
이 주 영
황 호 빈
어디에도 없지 않은 여기
글 한승은
1.
3년 전 봄 엄마와 함께 강릉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기차 안. 2024년을 기억하는 장소를 꼽는다면 기차는 선순위에 있다. 오제Marc Auge에 따르면 기차는 대표적인 비장소non-lieux. 기차는 장소일까 비장소일까. 나는 장소이면서 비장소고 비장소이면서 장소인 기차를 ‘괄호 친 비장소’라고 불러본다. (비)장소든 비(장소)든 (비장소)든 괄호의 자리는 괄호의 몫. 기차의 움직임이 공간을 시간화하고 시간을 공간화하는 여정.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여지.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여력. 서울역에서 강릉역, 다시 강릉역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두 시간은 기차라는 괄호의 존재다.
강릉에 오면 바다에 간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해변과 가까워서 조금 걷다보면 사진 찍기에 분주한 사람들로 붐빈다. 빈 백사장에 서서 검은 점이 빼곡한 저편을 바라볼 때마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각한다. 여행지라는 비장소. 바다를 보러 강릉에 오는 사람들에게 비장소가 되는 강릉. 당일치기가 가능해진 교통 여건은 강릉을 바다로 환원한다. 바다로 환원된 강릉은 지역민의 장소가 아니라 관광객의 비장소다.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 보며 늘어선 카페와 식당과 호텔은 멀리서 내려다보면 굵은 선처럼 보일 터. 사물의 윤곽처럼 선명한 경계는 장소와 비장소의 접선이다. 바다에 가는 시간. 휴대전화로 저마다 추억 남기기에 바쁜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이 시간들이 흐르듯 고인 기차와 해변. 여행을 수렴하는 기차와 해변은 전통적인 비장소일까 새로운 비장소일까. 서로 다른 사진 속 서로 닮은 배경은 어떤 비장소일까. 공간이 비장소가 되는 동기는 어떤 실천이다. 이편에서 바라보는 검은 점들을 연결하며 그들 각자의 비장소를 그리고 나의 비장소를 생각했다. 다르지만 닮았고 닮았지만 다른 장소들이 장소가 아니라면 그 동기는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푸코Michel Foucault는 유토피아에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를 발견한다. 유토피아는 발명의 산물이라면 헤테로피아는 발견의 산물이다. 발명보다 발견. 상상력의 다른 발로는 다름으로서의 새로움이다. 불가능한 이상이 동일성이라면 가능한 이상은 차이. 불가능한 이상은 발명되지만 가능한 이상은 발견된다. 양강지풍일구지난설. 양양과 강릉 사이 부는 바람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이 거세다고 직역하는 문장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야 말할 수 없는 경험의 강도를 잠재한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 한마디로 표현될 수 있다면 가능한 한마디는 감탄사. 감탄사는 경험의 강도를 지시하고 지시된 느낌은 물음이 된다. 어떤 경험이길래. 얼마나 대단했길래.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그것은 발명되는 것일까 발견되는 것일까. 뭐라 말하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은 발명되는 것일까 발견되는 것일까. 경험은 발명일까 발견일까. 발명은 이미 있는 것과 다른 무엇을 생성하는 것이라면 발견은 이미 있는 것을 달리 해석하는 것이다. 발명과 발견은 닮았으면서 다르다. 어쩌면 다르지 않을 둘의 다름을 핀셋으로 집듯 짚어본다면 혀 끝에 닿는 한마디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다름이 아닐까. 말할 수 없음과 말할 수 있음의 다름. 일구지난설이 말할 수 없음이기보다 말할 수 있음이라면. 경험의 강도를 내뱉는 감탄사가 말할 수 있음의 시작이라면. 그 잠재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발명이기보다 발견이다. 2024년 봄부터 겨울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 강한 바람이 강원 동해안 지역을 지나는 예사는 올해 예외를 품었다. 일구지난설.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말하는 전시는 말하는 순간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 전시는 보여주고 보고 보여지고 보이는 것. 보이는 말은 한마디로 일구지난설이다. 말할 수 없는 경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일구지난설이라면. 일구지난설이 감탄사라면. 2024년 대추무파인아트에서 보여준 일구지난설의 사건은 보는 만큼 보이고 보여주는 만큼 보여지는 경험의 강도를 발견한다. 일구지난설이라는 암호를 공유하는 작가들은 우리 각자의 일구지난설을 풀어내고 이들이 풀어내는 암호는 해독이자 해석이다. 일구지난설을 달리 풀어내는 우리 각자의 사건은 그래서 발견이다. 일구지난설이라는 한마디만큼은 남는 경험. 이만한 강도를 공유하기란 불가능하지 않기에. 해석으로서의 해독은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해소하기에. 닫힌 해독이 열린 해석이 되는 사건은 가능성이다.
박연후, 성상식, 이주영, 황호빈. 네 작가가 일구지난설의 그림자처럼 내뱉는 한마디가 있다면 시간이 아닐까.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려움이 지뢰처럼 숨어 있는 길이다. 지뢰를 밟아도 죽지 않고 덜 다치는 가능성은 시간에 있다. 어떻게든 살다보니 살아진 시간. 바람이 찾아오는 시간처럼 흘러가고 흘러오는 시간이다. 살다보니 살아지는 시간은 살아 있어서 살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가능성은 행위다. 바느질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연을 날리고 두부를 만든다. 행위가 남긴 흔적은 감탄사를 재발견한다. 울거나 웃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힘겹거나 신나거나.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경험의 강도는 재발견하는 감탄사의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기대한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3.
2024년 봄 전시에서 겨울 전시 사이 작가들은 봄 전시에서 보여준 작업을 발전시켰다. 발전은 행위. 이미 있는 것을 달리 해석하는 행위는 이미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생성한다. 발견하는 동시에 발명하는 행위. 시간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겨울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들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는 시간 혼자 작업하는 한편 여럿이 함께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바람을 느끼며 함께 걷고 함께 연을 만들어 날리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음악을 만들었다. 바람을 느끼며 걷는 과정을 기록하는 바느질. 포장 비닐로 연을 만들어 날리는 놀이. 직접 만들고 나눠 먹으며 음식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요리. 반향하는 주위와 소통하는 연주. 시간은 수많은 선을 품는다. 선은 움직임의 흔적. 행위의 흔적. 이동의 흔적이다. 바람을 따라 걷고 연을 날리는 행위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이 거센 바람을 품는다. 바람이 품는 행위가 바람을 품는 상호작용은 작업이어서 가능한 효과. 작업의 효과는 전통적인 장소를 새로운 비장소로 바꾼다. 새로운 공간은 여행지처럼 머문다. 이동한다. 다시 돌아오는 여행지는 역사를 생성하고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관계를 갱신한다. 발명하고 발견하는 효과. 발명은 발견되고 발견은 발명된다. 바람을 발견하는 작가는 바람을 발명한다. 발명된 바람은 재발견된다. 재발견되는 바람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이 강하다. 어느새 스며드는 바람은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보다 강하다. 바람을 품는 작업은 바람에 맞선 작업보다 강하다. 거세지 않고 강한 바람은 벅차다.
요리는 만드는 일이고 먹는 일이다. 요리하는 작업은 만들고 먹는 일을 재발견한다. 요리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품는다. 지금 여기의 레시피를 실행하는 행위는 흔적이다. 작업은 흔적이다. 두부를 만드는 도구와 두부를 만드는 영상은 행위가 작업이 되는 과정이자 결과. 감자적과 옥수수범벅을 만들어 나눠 먹는 현장은 경계요리를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다. 행위를 품는 시간은 어떤 장소일까. 일구지난설은 예사다. 삶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것투성이. ‘경계요리’라는 한마디는 이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작업이고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야 말할 수 없는 실천이다. 연주 또한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야 말할 수 없는 경험이다. 연주하는 사람도 연주를 감상하는 사람도 지금 여기에 함께 있기에 말할 수 있을 경험을 나눈다. ‘일구지난설’을 노래하는 행위는 일구지난설이라는 한마디를 말할 수 있는 지표다. 행위를 매체 삼는 작업은 경험의 강도를 재발견하고 강도 높은 경험은 지금 여기를 재발견한다. 다시 발견되는 장소는 지금 여기 머문다. 머무는 장소는 이동하고 이동하는 장소는 돌아온다. 돌아오는 장소는 다시 발견되고 다시 발견되는 장소는 여전히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헤테로토피아가 비장소라면. 우리가 찾는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 있는 장소다.
4.
유토피아는 있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장소가 헤테로토피아라면. 장소가 아닌 장소가 비장소로 존재하듯 부정은 무가 아니다. 없음으로서 있음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결핍. 긍정하고 긍정되는 결핍이다. 내게 강릉은 결핍이다. 결핍은 상대적이지만 강릉을 다른 어딘가의 결핍이라 할 수는 없다. 긍정에 상대적인 부정. 무가 아닌 부정이다. 내 몸의 어디는 내가 볼 수 있는 한편 다른 어디는 나도 볼 수 없듯 헤테로토피아는 내가 몸담는 곳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현존. 괄호가 움직이는 흔적이다. 일 년이라는 시간. 강릉과 양양이라는 공간. 일구지난설이라는 사건. 장소면서 비장소고 유토피아면서 헤테로토피아인 지금 여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행위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말할 수 없음을 표현하는 실천이다. 말할 수 없는 결핍은 말할 수 없음이 결핍이면서 결핍을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터. 그래서 상상한 만큼 말할 수 있는 일구지난설은 지금 살아 있는 여기, 실천의 여정을 상상하는 지금 여기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 여기는 양강지풍일구지난설. 양양과 강릉 사이 부는 바람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가능성, 없는 만큼 있는 잠재성의 실천이다. 지금이 돌아오는 여기, 돌아오는 지금과 함께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말할 수 없는 여기, 부정해도 없지 않은 여기다. 우리 각자의 비장소는 다르지만 닮았고 닮았지만 다르지 않다는 걸. 장소가 아닌 장소를 상상하는 만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유토피아는 헤테로피아를 발견한다는 걸. 말할 수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동기는 한마디라는 걸. 다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