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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 혜

2012.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동양화 전공 졸업

2016.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 전공 석사 졸업

Selected Solo 

2023. <MENARITORI> 대추무파인아트, 강릉

2023. 수림미술상 수상 작가전, 수림큐브, 서울

2023. <방울물과 지느러미 발> 박수근 미술관, 양구

2021. <구멍 난 자리에서 춤을 추는>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0. <나무 껍질을 입는 몸> 대전 테미예술창작센터, 대전

2019. <버무려진 막> 가창 창작스튜디오, 대구

2018. <버무려진> 영천 예술창작스튜디오, 영천

SelectedGroup

2022. <생생화화-공간 12인 3색> 영은미술관, 경기

2021. <수림미술상 후보작가전> 김희수 아트센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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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나리’는 한반도 동쪽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요와 무가(巫歌)를 일컫는다. 경토리, 남도토리, 메나리토리 등 ‘토리’는 지역마다 다른 음악적 특징을 가리킨다. 한숨이나 푸념처럼 진듯한 맛을 주는 메나리토리의 흥얼거림[1]은 ‘시김새’를 닮았다. 지난 몇 년간 여러 지역에 머물며 여러 할머니를 만난 서인혜는 할머니들이 들려준 노래 몇 마디와 노래도 말도 미처 되지 못한 흥얼거림에서 “중심음과 중심음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미분음을 연결해주는 시김새”를 떠올렸다. 그리고 메나리토리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서 다시 ‘할머니의 시김새’를 들었다.

서인혜는 할머니의 삶에서 걸음을 멈추고, 거기 머무는 그녀의 몸은 할머니의 시간을 새긴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그리고 다시 손녀에게로 오랜 시간이 이어지듯, 태백산맥에 부딪는 노래는 골짜기를 맴도는 바람처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삶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서인혜가 불러내는 노래는 어떻게 메아리치는가. 물방울처럼 흩어지는 “소리방울”이 부유하는 가운데, 무지외반증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여인들은 거센 물살에 맞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듯 거친 땅에 여린 발을 딛고 무던히 걸어왔다(<방울물 여인>, <지느러미 발>). 물에서 와서 물로 돌아가는 오랜 시간은 어떻게 보이고 들리는가. 장면이라는 마디와 음절이라는 마디가 노래를 불러내는 작품들을 마주한 자리에서 그 아득함이 어떤 노래가 되어 귓가에 울리는지 온몸으로 느껴보자. 그리고 노래가 흐르는 풍경 속 할머니의 모습에서 그 노랫말을 찾아보자. 서인혜는 할머니들이 즐겨 입는, 표범 무늬 옷에서 ‘표범’, ‘멸종’, ‘변장과 위장’, ‘킬리만자로의 표범’, ‘빈센트 반 고흐’, ‘킬리만자로의 눈’, 그리고 그 너머의 기호들을 발견해나가고(<무너진 모퉁이의 노래>), 화려한 꽃무늬 의복에서 “물고기의 비늘(scale)을 떠올렸다가 몸을 덮고 있는 비늘 조각들이 음계(scale)가 되어 굽이굽이 흐르는 모습을 상상”한다(<율과 비늘>).

메(山)와 나리(花), 즉 ‘산에 핀 꽃’을 뜻하기도 하는 메나리토리는 산에서 메아리치는 노래이자 산에 핀 꽃이다. 할머니의 몸에 핀 꽃이 비늘이 되어 물살을 가르고 다시 음계가 되어 산에 울려 퍼진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과거가 미래가 되는 할머니의 시간에서 서인혜가 보고 들은 이야기는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그리고 할머니의 시간과 손녀의 시간이 만나는 곳에서 서인혜가 읊조리는 손녀의 꿈은 어떤 노래가 되는가. 눈을 뜨고 들어보자. 그리고 그 노래속으로 들어가보자(<건너는 이>).                                                                                                                               

- 한승은

[1] 김태균 칼럼니스트, "아리리 가면가고 오면 오는 초연함으로 핀 노래", 브레이크 뉴스, 2021년 6월 24일 웹 게재, 서인혜 작가의 작가노트 참고.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다면

서인혜, 《MENARITORI》, 대추무파인아트, 2023.10.13.~11.30.

 

/한승은, 문화예술 연구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한데 모여 흐르는 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먼저 발을 담근 물이 그다음에 발을 담근 물과 다르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대답을 보류한다.

서인혜의 작업은 모든 시간이 한데 모여 흐르는 물을 닮았다. 이 물은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간 곳이고, 먼 옛날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가 차례로 건넌 뒤 곽리자고와 여옥이 건너고, 이후 또 다른 이들이 누구도 예외랄 것 없이 건넌 물이다1). 삶이라는 이편과 죽음이라는 저편 사이에 강처럼 바다처럼 고이고 흐르는 물은 모든 시간이 현존하는 곳,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는 시간이다. 너무 오래되어 까마득한 시간은 몇 년 전의 생생한 시간과 겹치고, 고대가요가 불린 시간은 대중가요를 부르는 시간과 섞이고,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시간은 미래를 과거로 끌어오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간을 손에 쥔다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서인혜는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편집하고 조각을 만들고 글을 쓴다. 서인혜의 그림과 영상과 조각과 글은 모두 그녀가 움켜줬다면 움켜줬고 내려놓았다면 내려놓은 것들이다. 타고난 발의 통증에서 출발한 몸의 감각은 손끝에서 작품을 빚는다. 손을 떠난 작품은 작품의 시간을 살지만, 작품의 시간은 다시 작가의 시간을 수반한다. 나의 시간이 엄마의 시간에 속하고, 다시 할머니의 시간에 속하듯 말이다. 이 글은 손에서 시작한 시간에서 출발해 손에서 끝나는 시간으로 거듭 돌아오는 흐름의 받아쓰기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물처럼 시간은 멀리멀리 흘러가고, 오므린 손안에 남는 것은 여기저기 맺힌 물방울처럼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다. 서인혜의 작업은 흘러간 시간과 붙잡힌 시간 사이에서 움직이는 손을 닮았다. 몇 번이고 물에 손을 담갔다 꺼내며 새어 나가는 시간과 새어 나가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손이다. 그렇다면 서인혜의 작업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무엇이고 붙잡힌 시간은 무엇이며, 둘을 가늠하는 손은 무엇인가. 다음은 이 물음이 나온 배경에 대한 해명이다.

 

 빈곤한 이미지와 빛바랜 장면

서인혜의 영상을 구성하는 장면들은 모두 오래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동영상 플랫폼에서 검색해 볼 수 있는 옛 이미지들을, 오랫동안 거듭 유통되며 화질도 해상도도 저하된 그대로 썼다. 슈타이얼에 따르면,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움직이는 사본이다. 화질은 낮고, 해상도는 평균 이하. 그것은 가속될수록 저하된다. 빈곤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유령, 미리보기, 섬네일, 엇나간 관념이다. 그것은 떠도는 이미지로서 무료로 배포되고, 저속 인터넷 연결로 겨우 전송되고, 압축되고, 복제되고, 리핑되고(ripped), 리믹스되고, 다른 배포 경로로 복사되어 붙여넣기 된다.2)” 자본주의가 가속하면서 값도 저렴해지고 품질도 저하되는 이미지. ‘빈곤한 이미지’는 자본주의 경제라는 동시대 생산양식의 ‘기호적 생산’과 이에 따른 ‘탈물질화’를 표방한다3). <무너진 모퉁이의 노래>(2022~2023)에서 보이듯 표범 무늬가 자본주의의 한 상징이라면 ─ 천연 표범 가죽은 부자의 과시 욕구를, 표범 가죽을 모방한 옷은 서민의 부자 선망을 상징한다면 ─ 서인혜가 그러모은 빈곤한 이미지들 또한 자본주의의 한 상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상징으로 탈물질화한 기호는 개념 미술의 순수한 결정(結晶)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물을 건넌 이들이 물방울이 되고 간절한 슬픔의 노래가 “소리방울4)”이 되듯, 탈물질화한 장면들이 생산한 기호는 개념의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방울’이 되어 흩어지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서인혜가 선택한 기호와 그 기호들이 재생산하는 기호들이 계속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밝은 원색이나 화려한 꽃무늬 못지않게 표범 무늬 역시 할머니들이 즐겨 입는 패턴이다. 고가 표범 가죽이 아니라 저가 표범 무늬 옷을 입는 할머니들은 ‘표범’이 연상시키는 다양한 기호들로 미끄러진다. <무너진 모퉁이의 노래>는 모퉁이처럼 두드러지는 기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동안 기호 간 경계가 무너지는 효과를 포착한다. 서인혜가 만난 한 할머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은 할머니가 입는 표범 무늬 옷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묘한 조화는 기호들의 경계를 허물며 지속한다. 가사에 나오는 화가 반 고흐의 자화상, 표범 가죽 코트를 입은 유명 인사의 스냅사진, 표범을 포착한 자연 다큐멘터리와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1952)의 한 토막 등 곳곳에서 수집한 장면들은 무너지는 기호들처럼 경계를 허물며 맞붙는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고 산출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면, 쉽게 예상 가능하다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미지들이 나란히 배열된 결과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글 검색창에 ‘표범 무늬’를 입력하면 형형색색의 표범 무늬 패턴 이미지 가운데 표범무늬민달팽이, 표범무늬거북, 금린어 등 표범 무늬를 지닌 다른 종의 이미지가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표범 무늬’가 불러내는 ─ 모두 ‘표범 무늬’와 연관되지만 ─ 서로 다른 기호들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그들 각자의 가지를 뻗어나가고, 이 연상은 불규칙적으로 멈췄다가 재개한다. 언어의 계단이 있다면, 그 계단을 한 번에 한 칸씩 같은 속도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은 조금 느리게 두 칸, 다른 한 번은 약간 빠르게 세 칸, 또 다른 한 번은 좀 더 빠르게 두 칸 또는 아주 느리게 한 칸 오르는 식이라고 할까. 그렇게 서로 다른 속도와 보폭으로 발 디딘 데서 발화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낯선 언어에서 발견하는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운다.

빈곤한 이미지들로 직조한 또 다른 영상인 <방울물 여인>(2023)은 폭포를 배경 삼는다5).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떨어지는 폭포 너머로 보이는 듯 희부연 장면들은 곧 증발할 것 같다. 물에서 와서 물로 돌아가는 일은 끝없이 순환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흐르고 흘러 또 다른 아래로 떨어진다. 폭포로 모이는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의 순환 또한 끝이 없다. 빈곤한 이미지의 빈곤함은 역설적이게도, 폭포에 가린 듯 화질도 해상도도 떨어지는 장면으로서 풍족함을 획득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며 변하고, 인터넷 세계에서 수없이 복붙되며 변한 이미지는 거듭 흐려지고 불순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면서 흥미롭게도,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소비 체제의 산물로서, 선명하고 맑은 빛이 결여된 상태로써 빈곤한 이미지가 풍족하다면, 그 까닭은 시간에 있다. 시대가 바뀌고 매체가 바뀌며 도처에 머물고 수많은 손을 거친 이미지는 빛바랜 만큼 오랜 시간을 품는다. 서인혜는 시간이 풍족한 만큼 빛바랜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오래된 시간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서인혜의 영상은 오래되고 빛바랜 만큼 아득하고 아련하다. 이제야 시작(기원)을 따지는 것이나 벌써 끝을 가늠하는 것 모두 초연해 보이는 이미지들은 시작하는 발단과 끝나는 결말로 닫힌 서사 구조를 벗어나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일단 영상의 상영 시간이 주어지지만, 영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배치와 조합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와 무관하다.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간 문장들을 뒤섞고 재배치한 다음 일부 발췌해서 한 편의 글로 재구성한 듯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이 넓은 텍스트와, 인터넷 세상에서 떠도는 이미지들을 손이 가는 대로 수집한 다음 이미지의 프레임을 지운 듯 겹치자마자 밀려가고 밀려오는 장면들은 사실이나 확실성이 아니라 미스터리와 물음들에 연루된다6). 미스터리와 물음들이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을 메우고 장면들이 겹치자마자 밀려가고 밀려오도록 작동하는 영상은 상영 시간의 시작과 끝이 포획할 수 없는 시작의 바깥과 끝의 바깥으로 번지고 흘러가고 흩어진다.

 

 축적된 바탕과 오래된 물질

모계 유전으로 무지외반증을 물려받은 서인혜는 어머니를 거쳐 할머니에게 가닿는다. 그리고 그녀의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을 불러모은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던 기억을 간직한 작가는 돌아가시기 전 영화 <나이아가라>(1953)를 보고 싶다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물로 돌아갔을 할머니를 상상한다(<방울물 여인>). 물고기의 비늘 같은 방울물이 되어 물을 건넜을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할머니가 비늘 같은 방울물이 되었듯, 꽃무늬를 즐겨 입는 할머니들의 몸에도 꽃무늬를 닮은 비늘이 돋는다. 반짝이는 비늘로 뒤덮인 몸은 물속을 헤엄치고, 비늘은 음계가 되어 노래한다. 꽃무늬가 비늘이 되고, 다시 노래가 되는 상상을 구현한 <율과 비늘>(2023)은 꽃무늬가 그려진 파편들로 이루어졌다. 파편은 두껍고, 커다란 판이 부서진 듯 저마다 크기도 모양도 다르다. 저마다 다른 크기와 모양은 높이도 길이도 다른 음 같다. 그 음들이 퍼즐 맞추듯 한데 모이면 어떤 노래가 들릴까.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이 파들파들 떨리듯 물속에 울려 퍼지는 음들을 상상한다.

<율과 비늘>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나 벽화의 파편처럼 보인다(이번 전시장의 높고 넓은 벽면에 걸린 조각들은 한데 모여 있는 모습이 커다란 벽화를 연상시킨다). 출토된 유물 같은 조각들은 한국 전통 음계의 음들이 되어 오래된 노래를, 오래된 시간의 소리를 불러낸다. 할머니의 피부, 연장된 살갗처럼 할머니를 보호하는 옷-피부는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만큼 오래돼 보인다. 오래된 느낌은 작가가 할머니의 몸에서 시간의 흔적을 더듬었기 때문일 테다. 할머니의 오랜 시간은 더 오랜 시간을 불러낸다. 오랜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래되고 오래된 시간을 품은 유물 같은 조각 앞면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무늬는 과거 어느 시대 유행한 것이 아닐까 싶고, 옆면의 쪼개진 흔적은 여러 가지 성질의 물질이 섞여 있어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선인(先人)이 발휘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서인혜는 직접 폼보드, 신문지 등 여러 재료를 섞어 두꺼운 바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할머니들이 즐겨 입는 옷의 빛깔과 무늬를 그린 다음 쪼갰다. 할머니가 입은 옷이 할머니의 피부와 같다고 생각한 작가는 물고기의 비늘(scale)을 떠올렸다. 물고기의 몸에서 비늘이 떨어지듯 할머니의 피부가 된 옷이 무수한 천 조각으로 흩어지고, 비늘처럼 흩어지는 피부-옷-천 조각은 음계(scale)가 되어 울려 퍼진다. 작가가 그림을 그린 바탕을 쪼개 얻은 크고 작은 조각들은 바로 할머니의 피부고, 물고기의 비늘이고, 소리다.

<건너는 이>(2023)의 몸체에 달린 비즈가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음계의 음 같다면, 전시장 바닥에 놓인, <건너는 이>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작은 소품과 <율과 비늘>의 일부로 보이는 소품이 어우러진 설치는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할머니, 반짝이는 비늘로 뒤덮인 물고기를 닮았다. 진짜 돌과 진짜 비늘, 진짜 옷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묻지 않고서는 확실히 식별할 수 없는 재료를 섞어 만든, 돌 같고 비늘 같고 천 조각 같은 작품은 실재를 이질적으로 조합해 얻는 허구가 아니라 허구를 재조합해 얻는 허구다. 기호의 기호들이 한데 모여 재생산하는 기호는 그러나 현실에서 완전히 멀지 않다. 이중부정이 강한 긍정이 되는 것과 닮은 효과일까. 이른바 ‘이중허구’는 강한 실재를 내비치고, 변신을 거듭한 기호는 변신 이전을 기억한다. 의미가 미끄러져도 미끄러진 흔적이 남듯 ─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워도 쓴 흔적을 말끔히 없앨 수 없듯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호는 물길을 내고 부스러기 같은 흔적을 남긴다.

서인혜는 자연에서 돌을 가져오거나 공장에서 생산된 화면을 쓰지 않는다. 직접 만든 바탕에 그림을 그리고, 직접 만든 조형물로 돌을 상기시킨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미술가가 됐고, 쉼 없이 발을 놀리는 대신 손을 놀린다. 시각예술이자 조형예술인 미술의 기본에 충실한 작가는 자신의 창작물의 시각적·조형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성실하다. 이야기가 두드러지는 만큼 잊히기 쉬운 시각적·조형적 조건은 이야기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서인혜는 할머니가 입던 옷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재해석하고 재창출한 천 조각들을 흩어놓기도 모아놓기도 하며 옷을 해체한다. 어느덧 할머니의 피부처럼 보이는 옷의 물질성, 할머니를 덮는 화려한 무늬가 암시하는 기호의 상징성은 ─ 표범의 몸에서 진화한 검은 매화 무늬의 위장 효과와 같이, 할머니들이 즐겨/두루 입는 옷의 화려한 무늬는 변장 또는 위장 효과를 내비친다 ─ 그대로 박제되지 않는다. 옷의 물질성은 갱신되고 기호의 상징성은 변주된다. 시간의 더께는 두꺼운 피부고, 빛바랜 화려함은 보호색이다. 작품의 두께와 빛은 보이는 것만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화한다. 탈물질화하는 듯 개념방울이 되는 물질은 증발한 물이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내리듯, 다시 물질이 된다. 물질과 탈물질의 경계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며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물 같은 시간과 시간 같은 물

변화는 시간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보편적인 시간의 축에서 과거를 향한 퇴화와 미래를 향한 진화를 떠올리며 시작하자. 퇴화에서 진화로 가는 시간의 위계질서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나아가는 행보에서 휘청인다. 과거는 이미 간 시간이기에 잊히기 시작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기에 알 수 없으므로 현재에 그리는 과거와 미래는 모두 환상이다. 즉 퇴화하는 과거와 진화하는 미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현재는 사실을 좇을 뿐 사실이 될 수 없다. 사실에 무한히 가까워지려는 역사의 욕망은 그래서 허구적인 면모를 털어내지 못한다. 서인혜는 진화와 퇴화의 방향을 바꾼다. 허구를 재조합한다. 원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곗바늘을 움직이듯 진화의 방향과 퇴화의 방향을 조정한다. 진화의 방향과 퇴화의 방향은 서로를 향하고, 현재에서 맞닥뜨리는 둘은 서로 다른 시간이 섞인 실체가 된다. <지느러미 발>(2023)은 현재에서 만나는 과거와 미래의 혼종체다. 물고기와 사람의 생물학적 관계는 물에서 비롯한 생명이 뭍으로 퍼져나갔다는 학계의 정설을 따른다. 그러나 굳이 진화생물학에 의지하지 않아도 물에서 뭍으로 왔다가 뭍에서 물로 가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믿음은 낯설지 않다. 그 믿음은 선사시대 동굴벽화에 담긴 자연의 힘을 재해석하고, 신화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하는 신비의 힘을 재정립한다. 서인혜는 지금 여기서, 지느러미였던 먼 과거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발이 된 미래를 붙잡는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모인 현재에서, ‘부드러운 팥양갱으로 부드러운 뼈를 보충한’7) 부드러운 몸이 부드러운 물방울이 되어 물로 돌아가는 시간을 두 손으로 퍼 올린다.

<건너는 이>는 사랑하는 이에게 물을 건너지 말라는 말을 건네는 이이자 언젠가 물을 건너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이를 가리킨다. 앞선 전시 《공무도하公無渡河》(수림큐브, 2023.8.28.~10.05)에서 <백수광부의 눈>, <곽리자고>, <여옥>, <흐르는 공후인>과 함께였다가 혼자가 된 작품은 이전 전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향해 서 있다. 백수광부가 건넌 물은 그의 아내가 건넌 물이고, 조만간 이들의 목격자인 곽리자고가 건넜을 물이고 그의 아내 여옥이 건넜을 물이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백수광부를 향해 부른 노래는 곽리자고를 거쳐 여옥에게서 되살아났다. 물을 건너는 일은 노래를 전하는 일이다. 물을 건너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은 비늘의 모습을 띠었다가 음계가 되어 메아리친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는 이의 노래는 미지의 저편에 당도하고 나서도 멎지 않는다. 발 없는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가 있고, 말 없는 노래엔 음이 있다. 물고기의 헤엄도 잇따른 음의 진행도 모두 흐름이다. 걸음을 세고 말을 하듯 분절되지 않는 흐름은 미끄러짐이다. 물고기가 아닌 인간이 두 발로 미끄러지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의 발화가 미끄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인혜는 몸의 파편을 줍고 희미한 음소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엮는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 나가듯 언제든 미끄러져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 작품이라는 기호에 넣는다. 그리고 작품 밖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기호들은 다시 전시 공간을 떠돈다.

미끄러짐을 미끄러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까닭은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미끄러지는 언어는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건너되 익숙함의 감각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이편에서 공무도하가를 부르는 이들이고, 막연한 저편에서 이 노래가 어떻게 들릴지 알 수 없는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편에서 부르는 노래에 의지해 저편을 상상한다. ‘건너는 이’라 불리지만 건너지 않고 서 있는 이는 창밖을 보며 저편을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서사의 저편과 이편의 타자

식수가 제안한 ‘여성적 글쓰기’는 타자와 관계 맺는 방법을 뜻한다. “오늘날 글쓰기는 여성들의 것이다. 이건 도발이 아니다. 여성은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중략) 글쓰기, 그것은 내 안에서 타자가 통과함, 들어옴, 나감, 머묾이다. 그 타자는 나이며, 내가 아니다. 나는 그 타자가 될 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나를 살게 만든다.8)” 서인혜는 할머니의 옷에 찍힌 무늬, 물고기의 비늘, 나무껍질, 붉게 물든 김칫국물의 인상에 착안한다. 표면은 그 이면을 암시하고 내가 존재함은 너라는 존재자를 전제하듯, 서인혜는 제 안의 타자를 직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포착한다. 다시 말해, 서인혜를 드나드는 타자는 서인혜라는 자아와, 타자를 드나드는 서인혜는 타자의 자아와 낯섦을 겪는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만나는 일은 귀에 닿는 소리가 음량과 음색을 섞고 뜻을 나누는 일이다. 처음 만난 두 존재가 악수하듯, 어색함 속에서 정중한 인사를 주고받는 접촉이다. 서인혜는 할머니들이 선호하는 색과 무늬에서 옷에 반영된 할머니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나무껍질에서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인 할머니의 세월을 감각하며9), 한지와 천을 물들인 곱고 깊은 붉은색으로 식당을 운영하며 매일 김치를 담그는 어머니의 노동에 가닿는다.10)

여성적 글쓰기는 건너는 일이다. 미끄러지며 건너는 일이다. 지금껏 ‘글이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규칙에 얽매였다면, 그 규칙에서 벗어나 글쓰기의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자는 행동 방식이다. 여성적임은 남성적임이 주재하는 힘의 질서에 저항하는 타자성이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타자성을 발굴하고 연대하는 대안을 지향한다. 서인혜는 낯선 언어를 찾는다. 익숙한 말이 모여 낯설어지는 맥락, 말과 말 사이의 비약이 물음표를 남기는 발화. 익숙한 말은 낯선 말로 미끄러지고 말은 가까이 있는 말 대신 멀리 있는 말로 미끄러진다. 그렇게 여성적 글쓰기를 수행한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말을 조형 기호로 번역한다. 그리하여 말/글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그림이나 영상이나 조각이 구성하는 텍스트와 얽히고설킨다. 서로 다르다면 다른 텍스트는 서로 반사하고 반영하며 하나의 텍스트를 직조한다. 그렇게 여성적 글쓰기가 수행된다. 서인혜의 작업에서 읽히는 여성적 글쓰기의 흔적은 여성적 글쓰기를 수행하겠다는 전략의 산물이 아니다. 다만, 50여 년 전 등장한 ‘여성적 글쓰기’를 서인혜의 작업에서 읽어내려는 까닭은 여성적 글쓰기 담론에 입각한 해석이 지금도 유효하고 서인혜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여성적 글쓰기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여전히 남성 주체가 힘을 틀어쥔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다른 체계의 대안을 제시하는 실천으로서 아직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성적 글쓰기가 서인혜에게도 유효한 까닭은 그녀라는 자아가 그녀라는 타자를 발견하는 데서 나아가 더 많은 타자가 지나가는 몸의 시공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서인혜의 작업은 여성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가능성을 잠재한다. 누구나 자아이면서 타자고, 타자이면서 자아다. 둘 사이의 낯선 만남은 논리적인 전략이 아니라 감각적인 요구에서 비롯한다. 감각을 따른 글쓰기는 논리의 우위와 무관하다. 높은 데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처럼 강렬하고, 수평선을 따라 끊임없이 일렁이는 물처럼 담담하다. 서인혜의 작업은 폭포처럼 강렬하다가도 강물처럼 잔잔한 감정을 불러낸다. 감정을 수반하는 감각적 기호는 흐르는 물처럼 미끄러지고, 미끄러진 만큼 낯설어진다. 낯설었다가 낯익고, 낯익다가도 낯설어지는 흐름. 서인혜는 이 흐름에 발을 담그고 타자들을 불러모은다.

 

 미술은 시각예술이다. 미술은 가장 물질적인 예술이고, 그 물질성에 대한 감각은 시각에서 출발한다. 서인혜의 작업 역시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볼 것들은 보(이)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한편 보이지 않는 것을 짐작하고 상상하는 단서로서 머문다. 고고학자처럼 오래된 것들을 수집해, 그것들을 재조합하고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은 보면 들리고 들으면 보이는 경험의 매체를 산출한다. 이렇게 수집한 것들은 노래를 닮은 소리를, 노래가 되지 못한 소리를, 그러나 노래라 부르고 싶은 소리를 불러내며 눈앞에 있다. 서인혜는 인터넷 세상을 떠도는 영상 푸티지(footage)를 모으고, 색도 문양도 화려한 할머니의 옷에서 꽃무늬와 표범 무늬 파편을 줍고, 발의 뼈대와 지느러미의 해부도에서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인간의 발로 변화한 흔적을 포착한다. 이렇게 수집된 것들은 노래를 둘러싼 소리와 맞물린다. 그리고 아득한 옛 노래가 상기하는 장면은 장구한 시간이 응고된 돌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할머니처럼 세 개의 다리로 선 돌은 물을 건너듯 세상을 건너는 모든 이가 부르는 노래를 불러낸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내가 지금 여기라고 인식하는 시공간과 동시에 존재하는, 잠재하는 무수한 시공간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지금 여기가 현존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의 차원을 무한대로 증식한다. 3차원을 끝없이 제곱하는 차원. 그 차원은 지금 여기를 영원히 존속하는 것은 아닐까. 서인혜는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출발해 더 많은 여성에게로 침투한다. 달리 표현하면, 서인혜에게 침투한 다른 여성에게로 침투한다. 그리고 물안개에 젖듯 침투되고 침투한 경험을 조형 언어로 표현한다. 그 언어는 아직 낯선 의미를 전달하는 오래된 시구를 싣고, 동음이의어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비약하며 멀리 나아가는가 하면, 어느덧 낯설지만은 않은 의미를 싣고, 서로 다르되 다르지만은 않은 말들을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가까이 다가온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아가는 이, 저편에서 이편으로 나아가는 이, 그리하여 건너는 동시에 머무는 이는 자아이기도 타자이기도 하고, 자아이면서 타자이기도 하고, 이들의 몸을 덮은 무늬이기도 하고, 그 무늬를 닮은 비늘이기도 하고, 노래도 말도 아닌 소리이기도 하다. 이들이 한데 모인 물, 그 물은 모든 시간을 품고 고인 듯 흐르고 흐르듯 고인다. 지금 여기 발을 담그면 모든 이와 만나고 모든 시간과 만날 수 있을까.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다면,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 있다.

1) 서인혜는 개인전 《공무도하公無渡河》(수림큐브, 2023.8.28.~10.05.)에서 고대가요 ‘공무도하가’에 착안한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백수광부(白首狂夫)를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백수광부의 아내가 백수광부의 뒤를 따라 물을 건너는 모습을 본 곽리자고는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이 장면을 이야기했고,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백수광부의 아내가 부른 노래를 이어 불렀다. 여옥이 공후(箜篌)를 타며 불렀다는 노래가 바로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로 시작하는, 한국 시가 사상 가장 오래됐다고 알려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또는 ‘공후인(箜篌引)’이다. 서인혜는 공무도하가라는 노래와 노래에 얽힌 인물들을 모티프로 <백수광부의 눈>, <곽리자고>, <여옥>, <흐르는 공후인>, <건너는 이>와 같은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2)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41쪽.

3) 『스크린의 추방자들』, 54쪽 내용 참고.

4)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작품 <긴힛ᄃᆞᆫ 그츠리잇가>(2022)에서 바위를 닮은 커다란 조형물에 설치된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뜨는 텍스트를 보면 ‘소리방울’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소리방울’이라는 조어의 배경을 서인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상에서 채석강의 모습이 나오는데, 채석강 돌 사이사이로 물이 똑똑 흐르는 장면이 있다. 그 물방울들을 ‘소리방울’이라고 생각했고, 채석강의 돌 표면을 악보로 봤다면 물방울들은 음표라고 봤다. 그리고 그 물방울-음표들은 내가 시김새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미분음들이다. ‘잃어버린 소리방울’이란 정음이 되지 못한 주변음, 즉 미분음이다.”

5) 이번 전시에서 <방울물 여인>은 LCD 모니터로 볼 수 있지만, 앞선 전시(《공무도하公無渡河》, 수림큐브, 2023.8.28.~10.05. 《방울물과 지느러미 발》, 박수근 파빌리온, 2023.4.8.~5.28.)에서는 버티컬 블라인드에 투사됐다. 희부연 영상은 블라인드를 치면 보이고 걷으면 보이지 않을 듯이, 마치 폭포수의 물방울이 공중에 흩어지듯 사라질 것만 같다. 화면 양쪽으로 붉은 커튼이 쳐진 <무너진 모퉁이의 노래>는 깜깜한 상영관 내부와 빛을 발하는 스크린의 대비를 연상시킨다면, 버티컬 블라인드 위에 머무는 <방울물 여인>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하얗게 바랜 시야를 연상시킨다.

6) 『엘렌 식수』, 이언 블라이스·수전 셀러스 지음, 김남이 옮김, 책세상, 2023, 116쪽 내용 참고.

7) “그녀는 팥양갱을 좋아했다 항상 그녀의 집에는 팥양갱이 있었다 관절과 힘줄 사이를 지탱해주는 부드럽고 작고 연약한 작고 둥근 뼈 아마도 그녀는 자신에게 부족한 연약한 그 뼈를 달콤하고 부드러운 양갱으로 보충하고 싶었나보다” 서인혜, <지느러미 발>, 2023, 순지에 잉크, 24×76㎝.

8)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 식수 지음, 박혜영 옮김, 동문선, 2004, 98쪽.

9) “전시 ‘나무 껍질을 입는 몸’(2020)에서 서인혜는 세월을 담아내는 할머니의 피부와 나무 껍질, 종이를 개념적으로 엮어 인간의 삶과 생명의 기운, 자연의 섭리를 고민했던 자신의 여정을 보여준다.” 「나무껍질을 입는 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7기 입주작가 서인혜 개인전 《방울물과 지느러미 발》(박수근 파빌리온, 2023.4.8.~5.28.) 도록, 85쪽.

10) “작업의 시작은 작가의 어머니였다. 작가는 음식점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매일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성의 노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다 어머니의 어머니인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렇게 이어진 작업. 한지와 천에 붉은색을 입힌 뒤 설치한 <버무려진 이야기>(2017), <버무려진>(2018), 그리고 영상 작업인 <버무려진 노동>(2017), <열무>(2019)는 가정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따르며 삶을 꾸려나가는 어머니의 노동을 담담한 어조로 보여주었다.” 서인혜 개인전 《방울물과 지느러미 발》 도록,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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