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호 (1953 ~ )
197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85. 국립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부 석사 졸업
Selected Solo
2023 말 없는 말이 하는 말, 대추무 파인 아트, 강릉
2021 Obscurity-2021, 갤러리시몬, 서울
2018 김종영 미술상 수상기념전, 김종영미술관, 서울
2017 Vanished Landscape 미메시스 미술관, 경기
2016 리안갤러리, 대구
2016 New drawing, 갤러리밈, 서울
2012 Scape Drawing, 금호미술관, 서울
2012 Scape Drawing, 학고재갤러리, 서울
2006 Heure entre chien et loup - 모호함, 금호미술관, 서울
1999 부유하는 기억_나른함, 금호미술관, 서울
1985 파리시 7구 초대전, Salle Polyvalente du Conservatoire Muncipal du 7éme, Paris
Selected Group
2022 김종영 미술상 역대 수상작가전, 김종영미술관, 서울
2021 아웃도어 아트 코로나19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소마미술관, 서울
2021 空 Śūnyatā,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
2019 Simple 2019: 집, 장욱진미술관, 경기
2015 Korea Now, 벨기에 한국문화원, 벨기에
2015 한국화의 확장과 경계, 서울문화역 284, 서울
2015 장화진, 김태호 2인전: 스토브가 있는 아뜰리에-Mindscape, 서울시립 남서울미술, 서울
2014 사유로서의 형식-드로잉의 재발견 전, 뮤지엄 산, 강원
201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특별전 자이스트 가이스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3 아시아 코드-空, 소마미술관, 서울
2013 장면의 재구성,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서울
2012 사유의 방, OCI 미술관, 서울
2012 한획, 학고재갤러리, 서울
2011 21& their times, 금호미술관, 서울
2010 Eternal Blinking : Contemporary Art Gallery, 하와이 주립대학 갤러리, 하와이
2009 한국 현대미술 추억사 : 1970-80, 조선일보 미술관, 서울
2006 싱가폴 제21회 아시아 국제미술전, 싱가폴 국립현대미술관, 싱가폴
2005 한국현대작가초대전, 아테네 시립문화회관 멜리나, 그리스
2002 한국미술 2001 회화의 복권, 광저우 현대미술관, 중국
2001 사불산 윤필암: 꽃보다 아름다운 스님들의 도량, 학고재, 서울
2001 한국미술 2001 회화의 복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2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1 90년대 현대작가 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1991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 선재 현대미술관, 경주
1990 East bound, West bound, L.A 한국문화원, L.A
1988 한국 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8 80년대 한국미술의 위상전, 한강미술관, 서울
1987 1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브라질
1986 同異 展 (나고야시립미술관, 일본)
1985 8éme Salon de Figuration Critique, Grand Palais, Paris
1985 L' art Coreen d'aujourd'hui, Nice
1984 7éme Salon de Figuration Critique, Grand Palais, Paris
1980-1991 앙가쥬망전, 장욱진미술관 외 다수
Collection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 금호미술관, OCI미술관, 박수근미술관, 국회의사당, 일본주재 한국대사관, 쿠웨이트주재 한국대사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한경직기념관, 공간사, 전등사 외 다수
회화의 바깥으로
정 현 인하대학교 교수
“시간의 소멸을 체험하는 것,
한없이 멀리 떨어진 두 순간이 서로 만나기에 이르는 이 운동,(하략)”
- 모리스 블랑쇼
말없는 말. 전시의 표제다. 김태호는 자신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방문하여 바깥으로 꺼낸 후 그 흔적을 지워가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역설적인 작업 방식의 바탕에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공백을 담아내려는 작가적 의지가 배어있다. 말, 그것은 작가에게 ‘형상’에 가까운 무언가일 것이다. 말없는 말이라는 표제는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언어와 형상의 긴밀한 관계에 균열을 가한다. 말을 내뱉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곧바로 말은 안에서 밖으로 쏟아진다. 무게도 형태도 없지만 바깥으로 내던져진 말은 실재를 지워버리고 만다. 말 없는 말은 이처럼 언어의 바깥으로 나아간다. 온도, 습도, 바람과 빛, 먼지와 소음과 같은 현상을 포용하면서 말이다.
기억, 상상적 항해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희미해질 뿐. 기억의 원형이 반드시 상세한 내용을 온전하게 보관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진실이거나 진리가 될 수 없는 의미이다. 우리는 희미해진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지워진 것들의 흔적을 되찾기 위하여 허우적거리면서, 그럼에도 가끔 환희에 휩싸일 정도의 잠깐의 무아지경을 경험한다. 이렇듯 기억으로부터 길어낸 삶의 체험은 모두에게 열린 세계이지만, 누구라도 이런 경험을 가슴 속에 담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억들은 문맥을 가지지 않거나 부서진 채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기억은 연대기의 순서로 정렬되지 않는다. 김태호는 이 미결정상태의 기억들을 반복적으로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마주하는 풍경들은 자연의 경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풍경은 바로 이 기억에 관련된 또렷하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느낌, 정동의 흐름과 같은, 즉 현상학적인 감각 상태를 가리킨다. 과연 기억 찾기의 노정에서 그가 길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작가는 기억의 흔적을 타인에게 보이기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노라고 증언할 뿐이다. 기억을 더듬는 행위가 과거의 순수한 시간을 되찾아 주는 것일까? 모리스 블랑쇼는 “시간, 이것은 그저 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다양한 경험이 침전되어 있다”고 말한다. 되찾은 기억의 상은 매 순간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렇게 반복적으로 기억에의 접안을 시도한다. 매번 실패하면서도 또 다시 다가가기를 여전히 반복한다.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은 과거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지배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위계를 교란하여 결국엔 지워버리려는 일종의 미학적 사보타주(sabotage)라 불러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는 유년의 기억을 통하여 과거를 재현하기보다 수많은 과거의 일화들을 시간의 질서에서 꺼내어 평등한 상태로 전환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고 각각의 기억 들을 서로 공명시키려는 글쓰기의 도전이었다. 이처럼 김태호의 회화가 과거를 재구성하지 않고 기억의 파편, 편린, 흔적과 얼룩에게 그들만의 시간과 공간을 생성한다고 과정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시간은 주어진 질서의 바깥을 향하게 되고, 따라서 순수 시간이 출현한다. 기억에서 벗어난 순수 시간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의무에서 해방된다. 이제 기억의 흔적들은 시간의 바깥에 위치한다. 김태호에게 유년의 기억은 창작의 원형이자 기원과 같다. 그러나 기억의 풍경 속에서 헤매는 그의 모습을 또렷이 확인할 수는 없다. 기억을 (되)찾는 과정은 여러 겹의 덧칠이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색의 지층 배면에는 분명 이에 대한 흔적이 공존한다. 이제 누군가 그의 기억을 확인하는 건 무의미하다. 더듬더듬 기억을 좇는 과정, 그것은 애초부터 모호한 시도이기에 구체적인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간과 드로잉
“스케이프 드로잉”은 기억, 감각, 심상의 정동을 흐름을 풍경이라는 틀을 통해 포착해온 김태호 회화의 주요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풍경이란 자연의 재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구문화권에서는 풍경을 아름답게 재현된 자연을 가리켰다. 이는 자연의 다채로운 감각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시각성만으로 형성된 관습이다. 풍경을 뜻하는 프랑스어 paysage는 pays(나라/고장)와 âge(나이)가 결합된 단어로 ‘고장의 나이’로도 해석된다고 한다. 한편 영어 접미사 –scape는 접두어에 따라 풍경, 경치, 심리상태 등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처럼 스케이프는 가시적인 차원부터 영토의 넓이와 그것의 시간까지를 아우르는 다공적인 단어이다. 김태호에게 풍경이란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이 아니다. 풍경학자이자 동양철학가인 프랑스 철학가 프랑수아 줄리앙은 서구의 풍경 개념이 시각성에 고정되어있기에 풍경을 외적 표면으로 닫아버렸다고 평한다. 즉 풍경 내부의 원천적인 힘과 감각의 운동성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서구미술은 세잔이 등장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풍경이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이렇듯 풍경은 시각, 청각, 후각, 부피와 무게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포함한 세계이다. 김태호는 풍경이라는 공감각적인 은유의 통로를 통하여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거슬러 가고자 한다. 따라서 그에게 드로잉은 기억으로의 여정에서 만나는 헤아릴 수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미결정적인 흔적들을 열어젖히는 행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블랑쇼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프루스트의 여정에서 나타난 “무의식적 상기(réminiscence)라는 현상”을 두고 현재와 과거가 조응하는 (시간에 관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과거가 자신의 혀끝에서 되살아나는 상상적 경험은 시간의 방향이 뒤집히고 활처럼 구부러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실마리가 된다. 이처럼 유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경로는 지름길이 없다. 그래서 풍경은 과거를 찾아가는 무한의 약도와 같다. 그렇다고 애써 되찾아간 과거에서 길어 온 기억의 흔적을 덧칠하는 행위가 부조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복원할 수 없음에 대한 현실적인 체념일 수도 있고, 불가역적인 시간을 되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의 뒤틀림으로 인하여 낱말도 경치도 풍경도 되지 못한 불완전한 부유물을 소중히 보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시간을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작가가 바라는 것은 외형의 복원이 아닌 공통의 감각을 되찾으려는 의지가 아닐까. 기술에 의하여 시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장소의 의미도 달라진 시대이다. 아카이브 기능은 상시적으로 활성화되어 개인의 일상은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공유된다. 이처럼 기억을 대신하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겹친 상태와 다름없다. 순수 시간이란 음소(音素)처럼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블랑쇼는 프루스트의 기억의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분리한 ‘순수 시간’의 생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베네치아에서의 한 걸음과 게르망트 가에서의 한 걸음, 과거의 그때와 현재의 지금을, 서로 겹쳐 놓아야 할 두 개의 지금으로 묶어 내는 이 동시성을 통해서, 시간을 소거시키는 두 현재의 이러한 결합을 통해서 프루스트는 시간의 황홀경에 대한 독특하고 탁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회화의 바깥
김태호는 작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 쓰기가 곧 지우기가 되는 역설. 이는 블랑쇼의 철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부조리한 가능성이다. 존재 불가능한 상태를 상상하는 것은 또한 예술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상상해보자. 회화의 바깥을. 데리다는 작품도 아니고 작품의 바깥도 아닌 상태를 파레르곤(parergon) 개념으로 사유한 바 있다. 회화가 보이려면 그것을 감싼 액자에 의해 작품이라는 의미가 완결된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중심이 아닌 주변의 (미학적) 장치가 작품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점은 주와 부를 위계로 나누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이 둘의 상호작용이 의미를 산출한다. 이러한 연유로 데리다는 세계의 바깥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회화의 바깥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과연 데리다의 의견처럼 회화의 바깥은 불가능할까? 회화의 바깥이라는 화두는 시각성에 뿌리를 둔 회화의 특질을 제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서 바깥이란 관습화된 형식과 이를 따르는 감상의 전형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모더니즘 이후 회화가 끊임없이 전통 규범과 충돌하던 시기부터 인공지능과 대항하며 예술의 미래를 상상해야 하는 회화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가장자리에서는 이미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비언어적 예술인 회화는 끊임없이 그 경계를 넘어 언어, 소리, 사물, 공간, 신체의 개입을 시도한다, 뒤샹은 늘 하나의 차원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뒤샹은 망막에 기댄 원근법 회화 대신에 회화를 이질적인 매체와 방식을 이용하여 바깥으로의 탈주를 노렸다. 여기에 회화의 전통에 익숙한 감상자들은 습관적으로 회화를 이야기로 전환했다. 르네 마그리트,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와 같은 벨기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이미지와 언어를 교란시켜 미술작품을 대하는 사고 체계에 혼돈을 준 것도 회회가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개념회화를 주도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와의 연관성도 유추할 수 있다. 쉬포르/쉬르파스는 회화를 구성하는 질료를 표면과 구조로 분해하여 감상의 대상에서 체험해야 하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액자에 갇힌 회화에서 탈피하여 공간과 관람자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까지도 포함시킨 운동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작품을 보고 해석하는 차원에서 느끼도록 행동하는 차원으로의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열린 세계로서의 회화란 구상과 추상, 이미지와 텍스트, 시와 음악, 노동와 춤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 김태호는 회화적 서사를 제거하고 캔버스의 사물성을 드러냄으로써 회화의 경계를 미결정상태로 제안한다. 캔버스의 프레임의 경계는 완곡하게 다듬어져 다각형의 상태로 전시장에 배치(assembly)된다. 여러 겹으로 덧칠된 불투명한 회화-사물은 빛의 조건과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빛을 굴절하는 현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것은 회화의 신비로움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기보다 김태호 회화의 조형원리를 가늠하는 하나의 단서이다. 게다가 작가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소품이 전시의 일부로 기입된다. 작가는 작업과 일상을 직조하여 창작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희미하게 암시한다. 전시 공간 중앙에는 거칠게 조형된 얇은 판재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얽혀 안과 밖을 관통한다. 이처럼 김태호는 조형예술의 문법을 완곡하게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대비되는 감정의 굴곡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어쩌면 그의 예술세계를 지탱하는 저지대에 야생적인 비인칭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블랑쇼는 침묵이 언어 속에서 말하기 때문에 언어는 침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전시를 보는 과정을 창의적 독서로 비유한다면, <말없는 말이 하는 말>은 바로 침묵이 말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말인지, 아니면 언어의 바깥에서 솟아난 비명과 같은 단말마인지가 궁금하다. 결국 안과 밖은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카뮈가 사유한 것처럼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려는 실존을 향한 시도를 멈추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