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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수 (b. 198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도쿄예술대학 미술연구과 문화재 보존학 전공 보존수복 일본화과 석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석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 전공 박사 수료

Selected Solo Exhibitions

2023 <밤과 꿈> 갤러리 도스, 서울

2020 <Looking for the Sunflower Hill_지금이 좋은 순간>,

         갤러리 그리다, 서울

2018 <自我像_소소한 이야기> 갤러리 한옥, 서울

 

Residency

2024 Berlin Art Institute, Berlin Germany

2023 Far East 창작스튜디오, 강릉​

작품소장

​분당 서울대학교 병원 등

 김지수(1987-)는 동양화 매체를 탐구하며 천연 안료와 수묵 기법을 결합해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은 바람과 음악 같은 자연의 유동성을 반영하며, 단일 획의 강렬함을 통해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개인전 <밤이 하는 말>에서는 자아와 존재에 대한 탐구를 선보이며 독특한 시각 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강릉문화재단과 베를린 아트 인스티튜트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전통과 현대적 표현을 결합하는 작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01_김지수_삶풀이_퍼포먼스 비디오(스크린샷)_4096×2160_45’3

​전시 서문

 글  한 승 은

 밤은 말하지 않는다. 밤이 말한다면 그 말은 말이 아니다. 이렇게 단호한 까닭은 밤의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산물이다. 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떠나도 무관심한 시간이다. 인간이 없어도 모르는 빛이다. 김지수는 밤이 말한다고 한다. 인간이 없어도 모르는 빛이 인간이 떠나도 무관심한 시간이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없다. 말하는 밤은 없다.

 

 대화의 쌍방은 화자와 청자다. 화자보다 청자. 말하기보다 듣기. 낮이 화자라면 밤은 청자다. 이렇게 단호한 까닭은 밤에 기억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말은 아는 만큼 들린다면 청자의 말은 듣는 만큼 알려진다. 듣는 만큼 알려지는 말은 드러나기보다 숨는다. 머릿속과 마음속과 입속을 맴돈다. 김지수는 듣는다. 김지수라는 밤은 머릿속과 마음속과 입속을 맴도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낮이 남은 밤이다. 인간적인 밤은 말할 수 있을까. 낮을 말하고 밤을 듣는 인간은 밤이 될 수 있을까.

 

 김지수가 밤이라면. 맴도는 밤은 그림이 된다. 그림이 되는 동작은 말이 된다. 붙었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시작되는 말. 입속을 들여다보는 꿈 이후의 말이다. 듣는 만큼 알려지는 말은 들리는 만큼 알게 되는 말일 수 있을까. 아는 만큼 들리기보다 들리는 만큼 알려지는 말의 색은 밤이다. 입속에 빛을 머금은 밤이다. 말이 되려는 밤이다.

13_김지수_바람 드로잉 시리즈1_종이에 혼합재료_원형 디스크_지름 16cm_2024.jpg
14_김지수_바람 드로잉 시리즈2_종이에 혼합재료_원형 디스크_지름 16
12_김지수_드로잉 궁금함이란_종이에 혼합재료_29.5×41.8cm_2024.jpg

반전의 수묵화 또는 체내의 우주

글  荒井経 아라이 케이, 도쿄예술대학 문화재보존학 교수

 

 진한 검은 먹물을 큰 붓에 묻혀 한지를 넓게 칠해간다. 마르기를 반복하며 칠하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화면은 옻처럼 깊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한지의 흰색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김지수는 이제 자신의 몸과 붓이 연기할 무대를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다.

  인물 수묵화를 그려온 김지수가 검은 화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20년경이었다. 내가 서울대학교 아틀리에에서 본 작품은 검은 화면에 암채로 그린 산수풍의 추상 형태들이었다.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암석 안료 물감의 표현에서 조형적인 신선함을 느꼈고,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김지수가 이사한 강릉에서 본 작품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발전해 있었다. 거대한 검은 화면에는 호분의 백색을 사용한 유려한 추상 표현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그린 ‘반전의 수묵화’이다. 마찰을 동반한 선과 수많은 물방울은 우주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 표현은 특정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김지수의 몸 표현의 궤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즉, 김지수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몸 표현을 읽고, 몸 표현의 동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2024년 여름, 김지수는 베를린에서 레지던시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그림 작업 과정을 퍼포먼스 작품으로 영상화하고 있다. 바닥에 펼쳐진 큰 검은 천 위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는 김지수의 모습에서, 칠흑의 우주로 날아오르려는 긴장감이 전달되지만, 그녀가 날아오르려는 우주가 지구 너머의 우주일까? 나는 그녀가 내면의 우주로 뛰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면의 우주란 곧 ‘체내의 우주’이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김지수가 뛰어드는 체내 우주가, 자신이 잉태되어 온 어머니의 태내이자,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자기의 태내라는 것이다. 태내의 세계는 모호한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분명히 현존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무중력의 태내로 뛰어든 김지수는 신장하고, 회전하며, 응집하고, 때로는 확산하는 운동체가 된다. 우리는 운동의 흔적이 담긴 그림을 통해 그 세계에 접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동양화는 수묵화 전통과 현대 미술의 드로잉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왔다. 김지수 역시 그러한 갈등을 품고 있는 동양화가 중 한 명이었으나, 어머니가 된 화가의 표현은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적 딜레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동시에 보편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도 ‘체내의 우주’를 탐색할 김지수가 보여줄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10_김지수_바르는 가벼움_한지에 혼합재료_91×63cm_2024.jpg
07_김지수_스며든 무게_한지에 혼합재료_95×66cm_2024.jpg
08_김지수_바람이 불어올 때_한지에 혼합재료_91×63cm_2024.jpg
09_김지수_밀고 당기는_한지에 혼합재료_91×63cm_2024.jpg

 문이 닫혔다. 굳게 닫힌 문은 거대한 벽이 되어 머리 위로 어둡게 내려앉았다. 손을 더듬어도 문고리를 찾을 수 없다. 두껍고 무거운 장벽이었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드는 짙은 무게는 밤이 되고 화자가 된다.

 내면의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한 법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을 찾으며 이곳으로 왔다. 강릉에서 마주한 강한 바람은 작은 불씨를 타오르게 하고, 그동안 잊고 있던 어떤 영역이 이미 나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자연에서 찾은 빛과 어둠의 혼재는 다시 화자인 나를 가리킨다. 밤은 이제 빛과 어둠이 되었다.

 해는 점점 뜨거워지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갑다. 서늘한 바람에 실려온 옅은 그리움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따뜻하게 일렁이며 어루만지고, 아스라이 울리는, 그 무언가를 찾아 웅크림을 깨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몸으로 그리는 하얀 선율은 원형의 형상이 되어 어둠 위로 빛을 뿜는다.

 다시 벽을 바라본다. 새로운 문이 열린다. 

작가노트 중

11_김지수_난정서 구체_지필묵_지름 40cm 구체_2024.jpg
04_김지수_부드러운 바람과 가벼운 밤_장지에 먹과 채색_130×194cm_2024.jpg
05_김지수_벽과 별의 경계_장지에 먹과 채색_127.5×76.5cm_2024.jpg
03_김지수_가장 가까이 다가온 바람과 밤의 대화_장지에 먹과 채색_194×130cm_2024.jpg
06_김지수_빛을 짓는 사람_장지에 먹과 채색_162×112cm_2024.jpg

시작의 여분

 글 한승은   

 

모든 시작은 원형原型을 소급한다. 소급된 원형은 시작을 각인한다. 감각된 물질적 세계는 지각된 비물질적 세계가 되고 이성적으로 인식되는 비물질적 세계는 감성적으로 인식되는 물질적 세계가 된다. 감각된 물질적 세계라는 구체적 원형은 이성적으로 인식된 비물질적 세계라는 추상적 원형이 되고. 추상적 원형은 또 다른 구체적 원형을 보는 또 하나의 원형. 눈의 원형이 된다. 원형이라는 눈. 육안을 덮는 또 다른 눈은 보고 보이는 세상을 원형들로 채운다. 물질과 비물질. 구체와 추상. 원형과 원형의 경계는 없지 않되 바닷가처럼 일렁인다. 일렁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시작을 묻고 꿈을 답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모든 것이 미래를 꿈꾸는 과거가 된다. 모든 시작의 시제는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다.

 

김지수는 지난해 강릉에 왔다. 강릉으로 이주하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은 시작이다. 시작. 기원. 최초. 태초에 빛이 있었고 말이 있었다면. 태초의 반이 빛이고 말이었다면. 다른 반은 어둠이고 침묵이었을 것이다. 시작을 가정하는 말은 다른 시작을 가장하는 말인 법. 그리하여 시작은 소급되는 꿈이다. 김지수의 반이 빛이고 말이라면 다른 반은 어둠이고 침묵일 것이다. 김지수의 밤이 어둠이고 침묵이라면. 어둠이 빛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되는 경계는 어떻게 일렁이는가. 그 일렁임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들릴까. 김지수의 ‘밤’을 해석한다면. 설명도 분석도 아닌 해석은 은유를 상상한다. 상상될 은유는 김지수의 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말. 김지수의 밤이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의 번역이다. 번역이 은유하고 은유를 번역하는 또 다른 ‘말’이다.

 

*

듣는다와 들린다. 침묵을 듣는다면. 침묵이 들린다면. 나는 침묵을 말 없는 소리라고 정의하며 시작하겠다. 내가 만드는 소리와 나를 만드는 소리를 아우르는 소리 환경에서 말이 사라지고 남은 소리. 말을 들어내고 남은 소리. 그런가 하면 말에 덧붙는 소리. 말하는 동안 존재하는 ─ 말이 수반하는 ─ 침묵 같은 것들. 검게 찍힌 문자 사이. 문장 사이 존재하는 하얀 여백처럼 말이다.

김지수는 클래식classic 음악. 보통 서양 고전 음악이라고 번역하는 음악을 듣는다. 그중에서도 가사가 없는 음악. 기악곡을 듣는다. 가사는 말. 문자 언어다. 문자 언어는 가장 일반적인 언어고 그래서 가장 구체적인 소통 수단. 가장 객관적인 약속이다. 서로 다른 말이 오해의 소지를 갖는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언어의 기본값이다. 말을 잇는 문법 대신 음을 잇는 작곡법에 익숙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가사 없는 음악으로 일반적이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공감하고 소통하기가 쉽지 않다. 말이 되기 전의 소리. 말이 되지 못한 소리. 말이 될 수 없는 소리와 말 없는 음악은 닮았다. 말 없는 음악이 침묵하는 음악이라면. 침묵하는 음악은 듣는 사람의 내면을 향한다. 저마다의 내밀한 감정을 불러내는 음악은 내면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는다.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방법. 말을 찾는다. 김지수에게 가사 없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내면의 움직임이 찾는 말. 그러나 김지수가 찾는 말은 희박한 이야기다. 이야기가 되지 않거나 되지 못하는 말은 인적이 드문 길의 이정표처럼 드물다. 말 없는 음악에 맡긴 그림도 말이 없다. 음악으로서의 말. 음악 언어만큼 내밀한 그림으로서의 말. 미술 언어는 말을 찾지 않는 쪽을 택한다. 최소한의 말은 최대한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을까. 음악의 추상성과 미술의 추상성이 맞물린다. 추상성은 은유라면. 추상성이 온전하려면. 은유가 은유의 생애를 제대로 살려면. 은유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맥락을 이야기하는 은유가 되어야 한다.

 

예술의 기원起源은 기원祈願하는 행위였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에서 음악과 무용이 시작되고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굴 벽화에서 회화가 시작됐다. 최초의 예술은 생존을 도모하는 주술 효과를 기도했으니 인간은 왜 예술을 하느냐는 물음에 최초의 답을 찾는다면 살(아남)기 위해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렸다고 할 수 있을까. 세대가 거듭 바뀌며 역사가 구축되는 동안 불어난 가치들은 예술의 동기를 바꿨다. 풍족한 먹거리에 만족하고 대를 잇는 본능에 충실한 삶이 최초의 삶이자 최소한의 삶이라면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 장구한 세월의 층위만큼 두껍고 복잡해진 생존은 먹어야 사는 당위와 종을 보존하는 요구 이상이다. 가치를 지향하는 생존은 표현한다. 표현은 생존 이상. 생존 주체인 예술가는 자신의 생존을 표현한다.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삶을. 예술가로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삶을 표현한다.

 

최초의 음악은 고통에서 비롯한다. 공포는 두려움이고 불안이다. 고통을 수반한다. 두려움과 불안은 슬픔과 우울을 유발한다. 고통이다. 다만 애도된 결핍이 ‘슬픔’이라면 애도되지 못한 결핍은 ‘우울’이라는데. 달리 말해 슬픔은 상실을 회복하고 해소된다면 우울은 상실된 채 해소되지 못한 정신이다. 우울은 남는다. 남겨진 고통. 남겨진 인간은 실존적으로 불안하다. 불안한 인간은 막연히 두렵다. 음악이 공포를 잠재우거나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음악은 슬픔일 수 있을까. 모든 예술의 시작은 ─ ‘순수 예술fine art’이 발명된 17세기가 아니라 순수 예술로 분리되기 이전의 예술을 이야기하자 ─ 지향하는 바. 목적이 있었다. 예술이 수단이 되고 기능을 갖는 것은 가치를 생성하는 것.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의 순수한 가치를 생성한다면 불안에 작용하는 예술은 삶의 실존적인 가치를 생성한다. 뮤즈의 영감은 이런 의도로 밝혀지고 예술의 실존은 감정을 나누거나 씻는 일임이 새삼 자명해진다. 공감과 정화. 김지수의 작업이 공감과 정화에 충실하다면.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는 김지수는 어떤 불안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공포가 음악이 되듯 삶의 불안한 순간들은 발길을 붙잡는 한편 붙들린 발을 내딛는 힘이기도 하다. 붙들린 발길이 다시 움직이는 동기. 김지수의 불안은 작업의 동기고 작업하며 해소하는 감정은 그림에 남는다.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의미를 지닌 한 조각의 소리를 붙잡는 데서 음악이 일어난다면. 김지수는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의미를 지닌 한 조각의 말을 불러내고자 그림을 그린다. 음악이 일어나는 곳에서 그림이 일어난다. 문 너머 들려오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의 공포는 알려지지 않는 만큼 알려지는 것의 모호한 정체에서 발생한다. 김지수의 불안도 이렇게 실존적이지 않을까. 닫힌 문이 장벽이 된들 이편의 작가는 빛을 발견한다. 이 빛이 어디서 오는지 알려지지 않는 만큼 알려지는 까닭은 밤이 있고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과 쌍을 이룬다. 낮과 밤이 하루를 이루듯 작가 김지수의 삶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릴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작업하는 시간의 빛과 어둠. 그것을 그리는 과정이 김지수의 작업이라면. 김지수가 음악을 들으며 그린 그림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까.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의미는 의미를 상상하는 가능성을 잠재한다. 김지수가 제안하는 가능성은 작가 자신에게도 관객에게도 열려 있다. 열릴 수 있는 문이다. 벽 같은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

그리고 그려진다. 김지수가 그리는 몸짓. 천 위에 그려지는 몸짓. 검은 천 위에서 흰 페인트를 묻힌 싸리 빗자루를 움직이는 모습은 화면을 마주하는 평소 작업 방식과 다르면서도 닮았다. 다른 점은 화면의 방향 또는 위치고 다르지 않은 점은 김지수와 화면의 관계다. 눕힌/누운 화면과 세운/선 화면은 그리는 주체와의 관계를 달리 설정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라면 김지수에게 화면의 수직적 또는 수평적 위상은 정치적이지 않다. 김지수가 화면을 마주 보든 내려다보든 똑바로 서서 앞을 보든 웅크리고 앉아 아래를 보든 손에 쥔 것이 붓이든 싸리 빗자루든 붓에 호분을 묻히든 빗자루에 페인트를 묻히든 그녀가 표현하려는 내면은 하늘에 비친 해와 달과 별처럼 화면을 비추기 때문이다. 내면을 비춘 그림은 움직이는 몸 끝에서 점이 되고 선이 되고 면이 된다.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은 김지수와 화면의 관계를 보여준다. 서 있는 화면도 누워 있는 화면도 김지수가 곧게 서서 작업하는 몸짓도 숙이고 굽히며 작업하는 몸짓도 김지수의 내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데 충실하다. 몸짓의 역동성은 내면의 표현 강도와 맞물린다. 달라지고 싶고 솔직하고 싶은 의지가 의미가 된다면. 이 의미는 작가-주체와 화면-객체의 관계를 정치화하는 담론이 아니라 내면의 순수한 몸짓으로 수렴한다. 화면과 김지수의 관계는 검게 찍힌 문자 사이. 문장 사이 여백처럼 의미를 품는다. 바람이다. 몸짓은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은 몸짓을 일으킨다. 움직이는 만큼 일어나는 바람이 그림이 된다면. 김지수는 그걸 표현한다. 검은 먹 위에 하얀 호분. 자연에서 얻은 동양화의 재료는 그림의 무게가 가볍고도 무겁고 무겁고도 가볍게 느껴지는 동인動因이다. 탁하지 않은 어둠. 눈부시지 않은 밝음. 맑은 어둠과 은근한 밝음은 동양화 고유의 재료가 지닌 특유한 힘이다. 이 힘에 자연에서 받는 영감을 싣는 김지수는 그녀를 사로잡는 기운에 충실하다. 내면의 몸짓이 그려진다. 변화하고 싶은 김지수가 변화의 모티프로 삼는 몸짓은 작업하고 싶고 작업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의지는 작업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김지수에게 몸짓을 보여주는 작업을 전시하게 된 배경을 묻는다면 새로운 시도에 나서고 싶었다는 답이 돌아올 테다.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보다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려서 보여주려는 의지는 몸짓을 구성하는 한편 몸짓의 동기를 되묻는 동기가 된다. 원인도 동기고 결과도 동기다.

 

그리는 몸짓이 그림이 되고 작가가 된다면. 그림을 구성하는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요소로 흔히 분류되고 파악되는 것들은 굳이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한 요소들일 뿐이다. 그리는 몸짓이 붓을 그리는 붓이 되게 하고 사람을 그리는 사람이 되게 한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처럼 영상을 투사하는 화면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화면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는 과정. 몸짓이다. 김지수가 몸짓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그려지는 그림을 가리키는 한편 그렇게 가리켜진 그림이 그리기의 흔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이 몸짓의 흔적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그림들은 그림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그림을 그리는 몸짓을 담은 영상이 그림의 실존을 입증한다면. 그 까닭은 보이는 만큼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만큼 보이는 몸짓의 흔적에 있다. 몸짓이 그림을 가리킨다. 의미는 갖는 것인 동시에 주는 것. 작가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동시에 작가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그리는 몸짓은 실존이 입증된 그림들의 모임. 전시가 발산하고 수렴하는 원점이다.

 

김지수가 몸짓을 보여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림만이 아니라 그리는 몸과 그리는 몸짓을 보여주는 전시는 그림 앞에 선 작가를 그림 위에 앉은 작가로 제시한다. 그림을 그리는 몸짓은 그림을 만지는 몸짓이 되고 그림을 만지는 몸짓은 그림과 작가가 한 몸이 되는 현상이 된다. 그림과 작가가 한 몸이 되는 몸짓/현상은 그림보다 그리는 사람을 선명하게 부각하는 듯싶다가도 그림과 한 몸이 되는 사람을 바닷물의 염분처럼 그림 속에 녹인다. 그리는 몸짓은 그려지는 몸짓이다. 그려지고 그려져서 보이다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다가 보인다. 선명해지는 만큼 투명해지고 투명해지는 만큼 선명해지는 그리기는 몸짓이다. 보여주고 보고 말하기에 앞서는 몸짓. 이내 보여주고 보고 말하기에 뒤따르는 몸짓. 몸짓이 매개하는 전시는 읽는 만큼 보인다. 읽게 되는 것도 읽고 싶은 것도 보는 눈에 달렸지만 보여주는 눈이 쓰고 읽는 말은 다음과 같다. 작업은 내 삶의 의미라고. 그래서 그리는 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몸짓은 보이지 않아도 읽어야 하는 몸짓이다.

 

*

여성은 여성이 된다. 김지수는 여성이고 여성을 그린다. 실제 앞에 있는 모델이나 사진 속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막연히 상상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왔다. 얼핏 보면 살아 있는 여성을 보고 그린 듯한 초상화에서 여성성이 느껴지는 선에 작가의 심상을 담은 추상화로 나아갔다. 상상한 여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던 김지수가 여성의 윤곽으로 여성성을 표현하는 선에 몰두하기 시작한 시기는 자연이 작가에게 와닿는 감각과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그린 시기와 맞물린다. 자연이 작가의 감각을 일깨우고 일깨워진 감각이 감정을 일으키고 일어난 감정이 작업의 감각이 되는 과정은 바람을 닮았다. 움직임은 바람을 일으킨다. 김지수를 움직이는 바람. 김지수가 움직이는 바람. 자연의 바람과 작업의 바람이 닮았다면. 작가를 둘러싼 바람은 작가를 감싼 햇빛이고 작가가 바라보는 달과 별. 어둠의 빛이다. 공간이 장소가 되는 맥락은 나에게 달려 있다. 자연을 느끼는 김지수는 제 안의 밤을 밝힌다. 빛 없는 어둠은 없고 낮 없는 밤은 없는 법. 그렇게 내 장소가 된다. 김지수의 장소는 누구를 불러들일 수 있을까. 누군가의 장소와 만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어둠에 빛이 들고 밤을 밝히는 감각을 감정으로 불러낼 수 있을까.

 

바람. 밤. 여성. 자연. 김지수의 작업에서 읽는 상징의 열쇳말들이다. 이 단어들을 연결해 김지수의 작업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지수의 상징들은 사적이면서 공적이다. 둥근 선은 작가의 내면/감정에 충실하다면 담박한 색은 직감/직관에 충실하다. 내면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김지수의 작업은 그래서 개인적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에게 내면화된 상징적 지식은 작가의 조형 언어를 여성성의 익숙한 표현으로 읽게 한다. 시선의 끝을 알 수 없으나 닿는 데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여성들의 얼굴도 여성을 은유하는 원형적 상징인 자연과 밤도.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선의 굴곡과 휘감고 휘도는 바람의 형상도. 여성성을 나타내는 익숙한 시각성이다. 밤을 그림이 되게 하는 먹. 자연을 그림이 되게 하는 채색 안료. 동양화의 맑은 재료들은 서양화의 탁한 재료와 대비를 이루는 한편 각각 동양과 서양을 은유하는 여성과 남성을 상기시킨다. 김지수가 동양화 작가라는 사실. 그녀의 작업은 분명 동양화라는 작가의 의지와 내력은 동양의 여성성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맥락이기도 하다. 익숙한 여성성. 여성성의 익숙한 기호들은 진부하고 진부한 기호들은 잘 읽힌다. 암호를 독해decode하듯 난해한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는 주장은 편협하다. 다만 진부함을 재정의하는 작업. 그렇게 새로움을 재정의하는 작업은 동시대성을 확보한다. 다들 예라는데 아니라고 말하는 몸짓은 상대적인 저항이다. 상대적인 저항은 익숙함을 비트는 데서 시작한다.

 

원형圓形은 원형原型이다. 김지수의 하얀 원은 원형적 상징의 하나다. 익숙하다. 이 익숙한 원형적 상징으로서의 원형이 상징에서 은유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어떻게 필요할까. 은유의 의미 단위는 명사지만 은유가 의사소통의 의미 단위일 때 그것은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담화의 단위는 문장이니까. 김지수의 상징들이 명사라면 이 명사들이 계사로 연결되어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는 은유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문장이 모여 이야기가 되는 차원. 이번 전시를 이야기로 해석한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높은 천장에서 낮은 바닥으로 웅크린 그림. 천장을 보고 바닥에 누운 영상. 웅크린 그림이 품고 있었을 것 같은 구체球體. 나는 이번 전시의 글감을 이들에서 찾는다. 그림은 마주 보고 그리고 벽에 걸어 전시한다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가장자리를 벗어나는 몸짓. 김지수가 달라지고 싶어 시도한 방식은 고전적인 한편 고전적이지 않다. 김지수에게 새로운 방식은 그녀에게 새롭고 이러한 새로움은 내적으로 새롭기 때문에. 김지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새로움은 그녀가 맞닥뜨린 닫힌 문. 눈을 감아도 막막한 어둠. 어둠을 보는 김지수의 눈에 스민 빛과 같기 때문에. 닫힌 문. 문보다 벽. 벽 너머 어둠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작가에게 말이란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의미를 지닌 한 조각의 소리이기 때문에. 김지수의 심상에. 어둠에 스민 빛에 떠오른 여성의 얼굴. 그 얼굴을 떠올린 맥락과 그 얼굴을 그림 속 바람의 그림자처럼 그리는 맥락을 이야기한다면. 추상적인 표현/표정의 원형이 되는 여성과 덧없는 삶을 관조/노래하는 말(왕희지 『난정서』)을 곱씹는 작업에서 새로운 은유를 기대한다면.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도 좋다. 흐르는 물은 늘 새로우니까. 은유는 이야기니까. 단어가 문구가 되는 여분. 문구가 문장이 되는 여분. 문장이 문단이 되는 여분. 문단이 이야기가 되는 여분. 새롭지 않을 수 없는 여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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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는 고전적이지 않은 한편 고전적이다classic. 오래도록 동양화를 수련한 배경은 그녀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바탕이다. 20년 가까이 김지수가 성실하고 충실하게 몰두한 동양화 전통은 그녀에게 내재해 있다. 김지수의 작업 기반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동양화 전통은 그녀가 어떤 재료로 무엇을 그리든 그것을 동양화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근본이다.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줄기를 뻗어 올린 땅. 그 땅을 떠나지 않는. 떠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김지수의 그림은 그래서 고전적이다. 고전적인 그림은 익숙한 상징과도 맞물린다. 먹을 여러 겹 올린 장지 또는 한지 위에 호분으로 그린 바람과 빛은 각각 역동적인 선과 원으로 나타난다. 바람이 굵은 붓으로 힘 있게 그린 선이라면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그린 선은 여성의 얼굴을 내비친다. 힘 있다가도 섬세한 김지수의 선은 곧게 뻗지 않고 둥글게 나아간다. 선의 둥긂은 둥긂을 새로이 은유한다. 새로운 고전이 된다. 둥근 선의 힘은 가볍지 않다. 막막하지 않고 먹먹하다. 먹먹해서 묵직하다. 묵직한 바람은 부드럽다. 부드러운 바람은 부드러운 밤. 어둠을 보는 밝은 밤이다.

 

하루의 반은 밤이고 말의 반은 침묵이고 그림의 반은 몸짓이고 여성의 반은 은유다. 시작의 반이 결핍이라면. 결핍이 부재라면 시작의 다른 반은 존재다. 존재하는 시작의 결핍이 여분이라면. 결핍이 여분이 되는 까닭은 시작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의 반은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여분이다. 김지수의 결핍이 여분이 되는 시작은 무엇을 은유할 수 있을까. 밤이 하는 말이 말하기 시작한 흔적은 김지수가 움직이는 만큼 움직여지고 김지수가 보여주는 만큼 보이는 세계다. 김지수가 밤이라면. 하루의 반은 밤인 매일 그녀가 하는 말은 얼마나 나아갈 수 있을까. 세계의 가장자리를 어떻게 지워나갈 수 있을까. 지금 남은 것이 남길 미래는 또 다른 시작의 여분이다. 시작을 은유하는 여분. 김지수가 지워나가는 만큼 그려지는 선은 언제나 시작의 여분이다. 밤이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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