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은 철 (b. 1979)
단국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Alanus Hochschule für Kunst und Gesellschaft. Germany 석사 졸업
Selected Exhibitions
2023 <황야로의 도주> 예술의 시간, 서울
<No Future on Mondays, Scotty e.V>, 베를린, 독일
2022 <Re:imagine> 오분의 일, 광명
<당신의 서 있는 땅 위에>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행궁유람 행행행> 수원시립 아이파크미술관, 수원
2018 <Ausstellung 4, Kuenstlerforum Remagen> 레마겐, 독일
<Haus der Fehler, Kuenstlerforum Bonn> 본, 독일
Residency
2023 3기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 수원문화재단
2021 15기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시립미술관
2019 한달 레지던시 프로그램, 아트스페이스 오, 서울
최은철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로, 드로잉, 공간 설치, 설탕으로 만든 오브제, 사진 및 영상 작업을 통해 현대 사회의 대립적 이슈를 탐구한다. 특히 기후 변화, 사회적 양극화, 빈곤과 풍요, 타자와의 갈등 등 사회 전반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작업에 담아낸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 고래는 오지 않는다는 현대사회의 개발과 속도,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이러한 작품 세계는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와 인간이 잊고 살아가는 신화적, 제의적 세계를 비평적으로 재구성하여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강릉이라는 지역적 배경은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오죽헌시립박물관, 굴산사지 석불좌상, 경포대 등 강릉의 유서 깊은 장소들을 탐방하며 이곳의 역사적 유물과 자연환경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강릉의 잊혀진 문화유산을 재조명하며, 이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작가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과 역사를 되새기게 하고 관객들은 설탕으로 만든 오브제들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도시 문명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성격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최은철의 작업은 철저한 리서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적·고고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그의 시각적 아이디어는 이번 전시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작가는 강릉의 잊혀진 유물들을 현대적인 미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며, 예술과 고고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잊혀진 역사를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최은철의 개인전 <고래는 오지 않는다>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자연, 시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신화적 의미를 재발견할 기회를 제공하며, 강릉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최 은 철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혹은 그걸 인식하게 될 때 오늘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까?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이곳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 말하게 될까? 하지만 이것들 중 진실이 있긴 할까? — 블라디미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는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 자신이 자고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자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문한다. 내일 잠에서 깨어날 때 오늘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리고 에스트라공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이 질문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가 겪는 심리적 혼란을 잘 보여준다. 고도는 오지 않는 희망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이 희망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지만, 그 희망은 자주 현실에서 좌절된다. 결국 사람들은 내일이라는 희망에 집착하면서 오늘을 상실하게 되며,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는 단순한 기다림을 넘어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
고도의 부재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지만, 작가에게 마치 "인간 문명의 유물"처럼 비유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이 의미 있기를 바라지만, 고도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들의 삶이 마치 무의미한 유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물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유물은 과거의 의미를 현재와 연결 짓고, 그로 인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며, 사회적 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 프로젝트는 한송사와 한송사지의 좌우 협시보살상,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부처의 삼존불에 얽힌 이야기는 강릉이라는 특별한 장소와 해일로 인해 폐허가 된 사찰 터에서 시작된다. 한송사는 신라 시대에 건립된 사찰로, 그 당시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곳은 신라 불교 문화와 사찰 건축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로서, 시•공간의 독특한 특성이 혼재된 장소이다. 신라 시대 사찰에서 출토된 고려 전기의 좌우 협시보살상은 그 시대의 불교 미술과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며, 삼존불에 대한 가설을 제기하게 한다. 특히, 이 보살상 중 석불좌상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라 다시 돌아왔다. 작가는 이렇게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유물의 인연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부처를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인 고래로 치환한다.



작품에서 작가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좌우 협시보살상을 레플리카 형태로 재현하며, 이를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로 명명한다. 학자들의 가설로 제기된 삼존불에 해당하는 부처 좌상은 유사 유물인 범주로서 설탕으로 재현되어, <흘러내리는 유물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된다. 이 설탕으로 만든 부처는 전시 기간 시간성과 환경에, 서사에 따라 천천히 녹아내린다. 작가는 설탕을 매체로 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설탕은 그에게 현대 도시 문명의 밝고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물질이다. 설탕은 현대 노동자의 피로를 달래주는 자극제인 동시에 그 중독성으로 인해 만성질환과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흘러내리는 유물들>은 설탕과 유물을 통해 문명, 노동, 그리고 역사적 유물의 개념을 결합한다. 이 작품은 모든 문명이 성장과 쇠퇴의 순환을 피할 수 없음을, 그리고 아무리 위대한 유물이라 해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전시장에서 녹아 흐르는 이 작품은 문명의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난류문은 한송사 사찰의 일주문을 재해석한 목조 설치 작업으로, 난기류 속에서 뒤집힌 절의 지붕과 지붕을 감싼 지층의 형태를 보인다. 이 지층은 현재 공군부대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시간의 무의미한 흐름을 선의 곡률로 비추고 있다. <신유적캐슬, 2024>과 <황야의 Wanted>는 물질적 가치를 좇는 현대 사회의 시선을 반영한다. 작가는 서로 연계되지 않은 유물, 문화재, 환경 등을 콜라주 하여 심미적 외형을 만들어낸다. 높은 상품성을 위해 문화, 역사, 주거환경, 개념을 이질적으로 혼합한 소비 사회는 소유라는 강한 욕망을 자극한다. 전시장의 사진들은 마치 상품 카탈로그처럼 자신을 뽐내며, 재구성된 유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역사성을 잃고 상품으로 전락한 우리의 과거를 드러낸다. 영상 작품 <고래는 오지 않는다>는 폐쇄된 장소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상상 속 한송사를 소조 작업 후 물에 녹아가는 과정을 강릉의 문화와 자연 풍경에 녹여내고 있다. 바다의 윤슬처럼 반짝이는 폭우, 파도, 구름 등의 반복적인 영상 장면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 녹아버린 문화재가 다시 생성되고 복원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이 프로젝트 속에서의 기다림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현대 사회에서 과거의 기억과 기대가 현재를 지배하는 가운데, 그 결과가 현대인에게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의미 없는 유물'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강릉에서 고래를 기다렸듯이, 고래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고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물은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찬란했던 인간 문명의 과거 시간 속에 잠들었던 기대와 소망이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현재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처럼, 고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며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어루만지는 상징적 존재로 떠오른다. 이 고래는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끈질긴 의지와 맞닿아 있으며, 기다림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것이다.


최은철의 거짓 유물과 불멸의 터, 회절하는 시간
조주리 (전시기획, 미술평론)
여러모로 최은철은 참 바지런한 이다. 한결같은 바지런함이 지나친 분주함으로 흩어지지 않고 산뜻하다는 점, 그 산뜻함이 인류의 물질문화와 정신사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건져올린 것들을 적절히 증류하고 연마하여 얻어낸 무게라는 점이 특별하다. 문화사적 상징이 풍부한 재료의 선택과 정성스런 만듦새, 환경에 조응하는 설치방식의 유연함은 최은철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이다. 작가 연구로부터 출발한 작업들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탈각시켜야 할 것들과 남겨야 할 것들을 분별하고 벼리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편, 여전히 작업에 관한 자기 표명과 비평적 서술에 있어 더욱 또렷한 관점과 입체적 해제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최은철의 작업이 오늘날 시각 예술가가 역사적 주제를 연구하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맞딱드리기 마련인 미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예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 작업에 기대하는 바가 진실을 촉구하거나 관람객을 계몽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은 작업의 자유도를 한껏 높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적 연구의 특이성을 입증해야 할 과제를 주기도 한다.
최은철의 작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래 전 사라진 것들과 머지않아 사라질 것들을 동시감각하는 작가의 비선형적 시간성과 문명비판적 사유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견인해온 일관된 태도였다. 그러나 전시가 지나간 자리에 다양한 질문과 새로운 해결과제가 남는다. 실존했던 사물을 가공의 레플리카로 재현하려는 작가적 노력이 오래전 망실된 것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가상의 원본에 다가가려는 고고학적 입장과 다를 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되고 방어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가에게 허용되는 문학적 상상력이 관객들에게 되돌아오는 반향점은 어떤 것일까? 필경 쉽지않은 질문거리고, 단편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하는 온갖 연구와 실행의 영역에서 역사적 상상력과 윤리 의식의 총량이 같을 수 없겠지만, 시각 예술가라고 해서 특별한 면죄부를 받거나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근거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예민함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일은 가장 그다운 발화 방식와 조형 양식을 정립해나가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전시 《.다않는 지오 는래고》는 ‘유물' (통칭하여 말하자면) 연작의 절정을 지나고 있는 동시에, 이전의 작업과는 거리를 두며 또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새어나오는 것 같다. 암호 살피듯 의도를 가늠해야 하는 호락호락하지 않는 제목으로부터 관람객은 각자의 시선을 좌우로 역전시키며 전시 앞에 선다. 좌우, 상하로 뒤집힌 것들에 대한 추적은 물리적 잔존을 거슬러가는 역-상상인데, 최은철의 전시에서 이항대립적 요소의 물리적 대비는 풍부한 해석과 반어적 이해를 유도하는 장치이다. 뒤집힌 제목, ‘고래는 오지 않는다.’ 로부터 다양한 반전과 역설을 예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전시에 앞서 중요한 참조점이라 할 수 있는 《황야의 도주》(2023)를 잠시 떠올려본다. 최은철은 근작에서 현대 물질문명 속에 잔존하는 과거 유물로부터 현대인의 정서적 황폐와 발전의 공허를 역설적으로 반추하고, ‘오늘날’이라는 시공이 얼마나 허약한 개념인지를 소격화된 유물의 연출로써 드러낸 바 있다. 직접 언급된 적은 없지만, 1927년에 발표된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 속 주인공처럼 물질문명과 불화하는 인간 풍경을 사람이 소거된 전시 풍경으로부터 떠올린 바 있다. 도시건설을 위해 수 천 년간 인류가 시도해왔던 것이 “황야로부터의(from) 도주”였다면, “황야를 향한(toward) 도주”가 의미하는 바는 반-문명으로의 도주 (불)가능성에 대한 자조적 진단인 동시에 그럼에도 ‘탈’역사적 시선으로, 혹은 반 문명인의 감각으로 세계의 질주를 감속시킬 당위에 대한 검토일 것으로 이해해 본다.
‘도주’의 태도는 때로 인간중심의 역사개념에 대한 배격으로, 반 행성적 사고가 몰고온 인류세에 대한 경고로, 정신성이 실종된 사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2024년 가을. 또 한 번의 도주다. 어느 때보다 드넓은 시간차를 거스르며 새로운 이야기가 재개된 곳은 강릉이다. 서울에서 꼬박 세 시간을 차로 달려, 강원도 강릉시 남항진의 바닷가에 이르면 한송사’지’, 즉 절터로만 남은 폐사지가 있다. 창간과 폐사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설화처럼 떠도는 옛 이야기와 조선시대 이곡이 지은 동유기(東遊記)라는 책에 잠깐 언급된 기록만이 짧게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 융성했다던 절은 고려와 조선을 지나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유물의 소실과 재회을 거듭하며 한 줌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사람도, 건축도 모두 스러진 자리에 끝내 살아남은 단 두 점의 문화재[1]만이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할 강력한 알리바이가 되었다. 어찌하여 사라진 절 이야기가 최은철에게 당도했고, 무엇이 그의 주의를 붙들었으며, 어떻게 사라진 기억과 기록이 그의 손을 타고 한 날 한시 전시라는 시공 안으로 소환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 또한 언젠가 기억 속에서 각색되고 사라져, 한 줌 에피소드로 남겠지만, 작가의 의도 안에 전시로써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것,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는 것,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을 파헤쳐 명료하게 재현할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짐작된다. 불변하는 자리 위에서 한송사가 이름 뿐인 터가 된 것처럼, 전시 역시 불변하는 터 위에서 일어난 물리적 망실과 기억의 공백, 그 사이를 매개하는 시간의 회절(回折)[2]을 좆는 또 하나의 ‘터’일 뿐인 셈이다.
시간과 공간, 기억이 정교하게 짜맞출 도리가 없으므로 전시는 더욱 엉뚱하게 흐르고, 자유롭게 증언할 심산인 듯 하다. 그러니, 전시라는 이름의 임의적 공간을 들여다보며 각각의 작업을 명명한 작가의 의도와 전시의 수사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최은철이 한송사지 이야기를 접하면서 강력하게 공명한 지점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터의 끈질긴 생명력과 존재의 회복성일 것으로 짐작된다. 디테일이 부족한 이야기의 헛점은 상상력이 투입되고 빠져나올 수 있는 기공을 마련하고, 그 틈으로 새로운 것들을 축조하고 살을 붙여볼만한 여지를 남긴다. 전시가 촉발된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작업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 한송사지 좌유협시보살좌상의 쌍을 이루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조각적으로 재현한 작업이다. 사라지고 흩어졌다 귀환하는 유물의 역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레플리카(replica)를 제작해 냈고 이로써 원본과 가본의 틈새를 명확하게 하였다.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이라 명명한 것은 겸허함의 표현인 것일까? 아마 그보다는 ‘역사' 개념의 불투명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자기방어의 일환일 수도 있다. 도처에 역사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협의의 ‘역사’란 후속세대들이 부여한 제도적 위계와 선별법일 것이다.
설탕을 재료로 사용한 <흘러내리는 유물들>은 어떠한가? 세월의 질곡을 정면으로 맞은 듯한 조각의 질료와 파편적 형상, 물리적 컨디션은 여지없이 풍부한 상징과 역설적 함의를 갖는다. 밀폐된 보존실에 영구 봉인될 것이 아니라면 어떤 유물도 산화와 부식을 피할 수 없다. 그 어떤 재료와 방법을 쓴다해도 전시 이전의 제작 시간, 전시 이후의 이동 경로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패하며, 기어이 소멸된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일상의 비루함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자리 위에 인류의 보물와 역사 속 유물을 정성스레 올려 놓은다 한들, 그것이 변치 않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은철의 생각과 움직임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그곳이 양자 물리학의 불가해한 진실도, 세상만물의 상대적 공리를 전하는 동양철학의 깨우침도,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추념하는 예술가의 노스탤지어도 아닐 것임을 믿는다. 오히려 도래하지 않을 어떤 존재에 투영하는 실낱같은 즐거움과 미련한 희망에 가까움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고래"는 세계의 허상을 의심하면서도 이 세계의 물질로서 현존하는 대상을 만들어 나가는 작가의 실천방식과 급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으로서 최은철이 허무를 양가적으로 투영하는 실존적 수사이다. 따라서 전시 소개글에서 고래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부처를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으로 서술한 구절은 그 자체로는 모순을 피했지만, 《.다않는 지오 는래고》로 명명된 전시의 표제로부터 결국 희망이 오지 않는다로 등치되는 순간, 또 한번 혼선을 준다. 그러나 기실 고래는 그 무엇으로도 치환됨 직 하다. 부처이자, 예수이자, 시간이자 물질이다. 또한, 과거의 미래이자, 미래의 미래다. 결국, 고래의 의미와 고래가 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 지는 보는 이의 관심사와 현실 상황에 달려 있다. 마치, “다는않 지오 는래고”로 쓰여있어야만 순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거울 너머의 별 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최은철의 문장을 순정한 의미로 받아들일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주어진 바를 거꾸로 뒤짚어 희망의 메지시로 수신할 것이다.
역전의 구조는 작업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한송사 사찰의 일주문을 재해석한 <난류문>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뒤집힌 절의 지붕과 이를 감싼 지층을 보여준다. 자연사적인 상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지층의 융기와 역전 현상을 문명의 상징인 종교 건축의 예시로써 만나게 되는 일은 불편하지만 가능세계의 진실이다. 해일 속에서 사라진 절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번 전시와 동명의 제목을 붙인 영상 작업 <고래는 오지 않는다>는 유동하는 물의 이미지와 순환 구조를 담고 있다. 7분 30초 가량의 영상은 한송사가 바닷물 속에서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는 순차적 흐름을 담고 있지만, 영상의 루프 속에서 시작과 끝을 연결하여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한순간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드러난 절의 이미지는 물질 세계의 유한함을 더욱 처연하게 상기시키지만, 그로써 세계가 절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바이기도 하다. 전시장 상층부에서 최은철은 다시금 보편 세계의 현실로 돌아오며 작품의 경계를 넓힌다. <신유적캐슬>과 <황야의 Wanted>는 기존작의 연작선상에서 현대 사회의 파괴적 풍경에 대한 직설적 묘사와 은유를 교차하며 펼쳐낸 작업들이다. 작품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서 빈번하게 발굴되는 과거의 사물들과 문화재로 승격화된 제도적 유물, 시각적 진귀함과 인테리어로 소비되는 앤틱과 빈티지, 쓰레기처럼 폐기되는 유사 유물이 혼재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을 시차없이 뒤섞어버리고, 가치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이며, 소유와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학습된 욕구일 것이다. 최은철에 의해 재구성된 유물들은 역사성을 상실하고 장식적 상품으로 전락한 과거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역사라는 이름를 걸친 모조적 풍경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로부터 가공의 역사를 상상하고 서사를 채워넣는 작업 사이의 거리를, 최은철의 일상으로부터 다시 재단해 본다.
시간의 감각을 몇 년 단위에서 다시 몇 백, 몇 천 단위로 늘려가다보면 단순한 깨달음이 온다. 모든 것이 매순간 존재하지만 동시에 매순간 소멸하고, 문명의 단위를 구분짓는 찬란한 유물과 세속의 잡스러운 것 사이의 차이 또한 무의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건축적 입면을 구성하거나, 가마 속에서 한 순간에 녹아들며 흐물텅한 점액이 되었다가, 이내 차가운 공기와 만나 경화된 도자가 된 최은철의 설탕 작업을 떠올릴 때면, “원자는 원자이고, 원자이고, 원자이다”라는 파인만((Richard P. Feynman, 1918~1988)의 물리학 명제가 떠오른다. 시간의 에돌이 속에서 영구히 존재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동이 달라질 뿐이다. 최은철이 그토록 열심히 만들어 낸 거짓 유물은 시간의 파동 속에서 휩쓸려나간 것들을 잠시 잠깐 주워담고, 튕겨져 나간것들을 붙잡는 과정에서 손에 남은 것들로 펼쳐낸 연막이거나 무의미한 소품일지도 모르겠다. 한송사도 고래도 삼존불의 부처상도, 결국 사라진 것들에 대한 허명 같은 것 아닐까. 존재가 휩쓸고 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신기루가 된 시간을 추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눈 앞에 존재하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함 일테고, 좌우상하를 제멋대로 뒤집어도 고요하게 남아있을 어떤 가치를 붙잡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는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최은철의 반어법을 떠올린다면 이미 내 곁에 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함께 믿고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도 같다. 내내 의심하고, 긴장하고, 헷갈리고, 신념을 바꿔나가는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솟아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1] 보물 제81호로 오죽헌 내 강릉 향토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불상과 국보 제124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이 그것이다. 보살상은 서로 짝을 이루는데, 지금은 다른 전시관에 떨어져 전시되어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두 보살상을 삼존불의 좌우 협시불(挾侍佛)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1912년 일본인 화전웅치가 일본으로 밀반출한 것을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 5월 돌려 받은 문화재다.대리석으로 조각된 석조보살좌상은 온화한 기품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불상으로 평가된다. 출처: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
[2] 회절(Diffraction)은 물리학 일반의 용어로, 파동의 전파가 장애물 때문에 일부가 차단되었을 때 장애물의 그림자 부분에까지도 파동이 전파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굴절하는 빛 파동 또는, 음파 임피던스,음향 파동 등 이러한 것들은 회절 현상과 관련 되어 있다. 본문에서 시간의 회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문학적 비유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시간과 공식 기록이라는 것도 수백, 수천년을 거치면서 인식의 장애와 방해 요소, 즉 기록의 부재와 이로 인한 인식의 변화와 수정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사적 파동과 전파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