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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 종 (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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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노스텍사스대학교 미술대학원 조각 전공, 회화 부전공 석사 졸업

Selected Solo 

2023 거룩한 낭비 Holy waste, 토탈미술관, 서울

2022 Landscape Pornography, 대추무파인아트, 강릉

2018 백만대군 (Million troops), 씨알콜렉티브, 서울

2011 뫔, 경기창작센터, 안산

2006 Oh My God! - 사랑, 사랑, 내 사랑. 아르코미술관, 서울

2001 자국,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1996 Camouflage, 금호미술관, 서울

        외 다수

Selected Group

2022 날것(The Raw),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0 내 나니 여자라,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나나랜드; 나답게 산다, 사비나 미술관, 서울

2018 식물학개론, 김창열미술관, 제주

2011 Show me your hair,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2008 고우영 이야기, 아르코미술관, 서울

2007 Eroticism 21c, 아트선재센터, 서울

2004 공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2 제4회 광주비엔날레, 멈춤(P_A_U_S_E), 광주

        바벨,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외 다수

Collection

국립현대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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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착시낭비구멍실눈플레이어

 

양 효실

 

 이순종-작가의 작업은 인용/차용하는 범주들, 일상에서 끌어오는 재료들, 개입해서 비틀려는 전제들이 복수이다. 비평가의 사회적 임무는 작업들을 ‘보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한 자리를 꿰차려는 사적 욕망과 연접하기에, 내가 이순종이 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던질 그물짜기에 여러 시간을 들인 것은 이 방만하고 산만한 작업들이 과연 투망질에 어울릴만한 것인지에 대한 불안때문이었다. 그물에 안 걸리는 물고기나 그물로는 낚기 힘든 타자나 그물이라는 비유 자체에 대한 재고로 왔다리갔다리......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작업하는 이순종 작가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글인데, 에로티즘이나 히스테리와 같은 기존 이순종 연구/비평의 관점은 일단 건드리지 않을/못할 것 같다. 그것들에 대한 나의 공부는 한없이 짧아서,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순종은 여러 방향으로 분산, 확산되는 스타일을 구사하면서, 관람자의 감상의 안전한 자리를 휘저으면서, 그때그때 자신을 유혹한 ‘대상/사물’에 맞춰 자신을 바꾸면서 게임 플레이어(player)처럼 움직인다. 나는 자신의 대상, 작업, 스타일을 통제하는 하나의 자리로서의 작가보다는 대상과 조건에 맞춰 자신의 자아를 변주하는 다중-인격자로서의 이순종에 맞춰 이 글을 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그물은 불가능한 것이고, 방만하고 산만한 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선 작가의 글 중 하나를 인용한다.

“딸, 아내, 어머니, 할머니인 나. 나의 일상 역할이 분산된 만큼이나 나의 작업 또한 갈래가 많다. 평면, 입체, 오브제,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재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 작업을 할 때 나는 목표나 계획이 없는 편이고 개념이나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 그냥 떠오르는 것들을 꺼내 씀으로 나의 작업은 사적인 경향이 많다. 말하자면 내 안의 무엇을 낭비하는 일이며 안 하면 고인 물처럼 썩을까 두렵다. 나의 작업은 살다가 부딪히는 일들의 해석이고 세상을 향한 통로이고 그 통로를 통해 나를 낭비한다. 그렇게 나를 순환시킨다./ 세계는 모순과 역설로 경험되고 때로 신비와 경이로움을 맛보인다./ 무목적으로 그냥 내 안의 것을 꺼내 써버리는 일, 작업, 활동, 나는 그것을 ‘거룩한 낭비’라 부르고 싶다.”1)

 이순종은 가족주의 내 여성의 여러 자리들을 오가면서, (여성)작가라는 ‘사족/덤’을 병행하면서 “살다가 부딪히는 일들의 해석”, 세상과 연결된 “통로를 통해 나를 낭비하는” 일, 고이고 썩지 않기 위해 “나를 순환시키는” 일, 스스로 “거룩한 낭비”라고 부르는 일을 한다고 적었다. 여성의 사회적 임무와 나란히 반-사회적 작가의 작업을 병행하는, 가사 일만 하다가는 고인물처럼 썩을까 두려움에 세계와의 연결통로를 만들고 그 통로를 통해 자신을 유출/낭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성의 가내노동을 밖으로 유출하는 식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것, 자신을 가정에서 사회로 내보내는 일, 자신과 사회의 연결성을 되찾고 숨통을 트는 일이 작업이다. 세 번 등장한 용어인 “낭비” 중 세 번째 등장한 “거룩한” 낭비는 자신을 다 써버리는 행위를 일견 성스러운 종교적 의식으로 이해하는 특이성을 드러낸다. 무목적적인 자기-소진이나 낭비를 예술활동으로 정의하는 이순종의 문장은 제한경제적 활동으로서의 가사노동과 작가가 일반경제적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예술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본 글의 짜임과 연관해서 더욱 눈길이 가는 문장은 “세계는 모순과 역설로 경험되고 때로 신비와 경이로움을 맛보인다”다. 동시대 실천의 딜레마나 곤궁을 현시하는 개념인 모순/역설은 종합이 불가능한 둘의 대치, 차이로서의 타자에 대한 전유나 동일시가 불가능한 위기를 가리킨다. 모순/역설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비교우위가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 심지어 대상에 의해 주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가리킨다. 모순/역설의 상태에서 그러므로 주체는 자기상실, 수치심, 자기부정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순간에 불과하다(이 순간은 잠시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죽음으로 넘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직후 자신의 주체성을 의식을 빌어 회복하기 때문이다. 이순종은 그런 비상사태, 위기의 순간인 모순/역설이 “때로 신비와 경이로움을 맛보인다”고 긍정한다. 주체의 종속이자 탈-종속으로서의 주체화가 함께 일어나는 순간을 이순종은 종교적 체험의 순간으로 간주한다. 종교적 배경에서 등장한 신비와 경이란 단어를 갖고 오지만, 그것이 과연 종교적 함의, 종교적 체험과 연접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술의 체험이 유사종교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너머의 존재가 일으키는 경이와 이순종 작가의 작업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역시 규명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제 나는 기꺼이 자신의 주체성을 내어주고, 모순과 역설을 피하지 않고 그런 주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의 한 가운데에서 신비나 경이를 음미하려는 작가 이순종(李純鐘)의 ‘이런 순종(this subjection/obedience)’, 많은 순종 중 ‘이런 순종’의 단수성(singularity)을 체험해보려고 한다. 투망질이나 종합과는 다른 짜기를 요구할 그 특이성을.

 대추무파인아트에서 열린, “조각과 설치”로 구성된 개인전 《Landscape Pornography》은 2003년의 작업부터 신작까지를 아우른다. 현재 레지던시 작가로 입주해 있는 양구 소재 박수근미술관 근처에서 올 초 발생한 산불 현장에서 갖고 온 탄 나무들과 재가 바닥에 놓이고, 벽에는 침(針)으로 만든 작품 《비무장지대》가 걸린 설치작업이 전시장 1층의 메인 공간을 차지한 전시에서 우리는 20여년에 걸친 작가의 작업의 탈중심화된 경향들, 차이들을 함께 보게 된다. 침을 이용해서 차용한 유사-회화들이 보이고, 다이소의 물건들로 만든 유사-조각들이 보이고, 종이에 먹으로 그린 유사-한국화도 보인다. 그럼에도 전시는 “조각과 설치”로 특정되어 있다. 다양한 장르들이 유희의 대상으로 소환되고, 특정한 장르가 이 유희에 한계를 만들어 준다. 우선 풍경 산수화, 인물 누드화를 차용한 작업들을 살펴보자. 벽에 걸린 《비무장지대》는 멀리서 실눈으로 보면 산수화이고, 가까이에서 동글게 눈을 뜨고 보면 비단 천에 박힌 무수한 침들이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변 같고, 산 같다. 수묵산수화에 대한 차용이고, 멀리서 이미지로 보았던 것이 가까이에서 오브제였음으로 드러날 때, 그렇다고 속은 감정을 뒤로 하고 속인 구조 때문에 꼭 정서적 후퇴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관습적 ‘감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일환이지만, 비단 천 뒤쪽에서 이쪽으로 무수한 침을 꽂아 산수화와 인물화의 이미지-상투형을 패러디한 작가의 비판적 전략/계산에도 불구하고 오브제로서의 침의 특수성 때문에 일견 이것이 패러디가 아니라 미메시스일 수도 있다는 혼돈/혼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범주상으로 조각이고 설치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나 암벽의 풍경을 패러디한(그러므로 미메시스한) 듯한 《계곡》이나 여성 누드화를 차용한 《전리품 비너스》에서도 우리는 전통 장르에 대한 재고(의심)와 사소한 일회용 오브제가 떼를 이루면서 어떤 힘/전언을 보유하고 있음을 동시에 보고 읽는다. 주지하듯이 패러디는 자신이 차용한 전거(reference)의 힘을 전복시키거나 아니면 그것의 힘을 한 번 더 주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양반들, 남성들의 문화로서의 산수화나 여성 누드화에 대한 이순종의 차용(패러디)은 침을 매체로, 오브제로, 사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예의 패러디의 모순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상 한의원에서 침은 인체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도구이다.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 몸에 기를 불어넣는 도구이자 일회용품인 침이 이제 이순종의 수정을 거쳐 인물화나 산수화의 바탕, 비단 천을 뚫는 데, 구멍을 내는 데 사용된다. 산수화나 인물화는 통상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사회)가 자신이 믿고 숭배하는 이미지들을 그리는 관습이다. 나타나는 대상은 좋은 것이고 욕망하는 것이다. 이순종은 침술사를 자처하면서 저쪽-바깥에서 이쪽-안으로 침을 놓는다. 인물화와 산수화의 관습에서 이순종은 뒤에 선다. 안 보이는 자리,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을 보이게 하면서 사라진 타자의 자리이다. 이순종은 인물화와 산수화가 막아버린 바깥, 뒤켠을 행위(사건)가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로 점유하고, 순환이 불가능한 내부에 기와 숨을 불어넣는다. 몇 개의 침이 아니라 숨이 막힐 만큼 많은 침이다. 비상사태인 것이거나 비상사태를 무대에 올리기 위한 과잉이다. 문제가 생긴 앞을 수리할 수 있는 것은 지금껏 침묵했던 뒤이다. 정면의 예술은 뒤쪽의 작용(개입)에 의해 울혈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이순종은 실눈으로는 이미지인 것을 부릅뜬 눈으로는 침-무더기로, 즉 회화를 조각/설치로 만들면서, 회화와 조각/설치 사이에서 놀면서, 인물화와 산수화를 희롱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유희를 ‘침’이 담지한 치유와 회생의 은유를 통해 진지한 어떤 것처럼 위장한다. 심지어 사용된 침이 너무 많기에, 만약 이것이 어떤 인체와 유비를 이루는 것이라면 이렇게 많은 침이 박힌 신체는 웃긴 것 아니냐는 불온한 기운이 서서히 자신의 온당한 지분을 요구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간절한 행위도 실눈으로 보면 웃기다. 믿는 자들 사이에는 안 믿는 자, 구경하는 자가 (숨어)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다른/불신하는 눈은 믿는 자들을 연기하는/속이려는 자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종의 자신을 다 써버리는 일의 “거룩함”은 자신의 주권성을 기꺼이 내려놓는 일이면서, 스스로 설치한 모순과 역설의 장면에서 유사-신으로써 신비와 경이를 음미하려는 데 있는 것일지 모른다. 예술가는 자신이 발견한 세계의 진실을 구조화할 방법을 찾으려는, 혹은 찾은 자이고, 그럼으로써 어디서나 자신의 진실에 충실할 수 있(으려)는 자이다. 이순종의 진실인바 모순/역설은 주체의 실패와 겸손, 타자의 우선성에 대한 성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신비/경이의 체험을 욕망한다. 이렇게 모순/역설 덕분에 음미할 수 있을 신비/경이는 무엇일까? 거룩한, 신비, 경이와 같은 이순종의 사적인 용어는 종교적 기원과 종교적 암시를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이를 드러낸다. 이렇게 많은 침을 꽂은 것은 치유에 대한 광적인, 도를 넘어서는, 미친 기원이거나 아니면 침을 꽂는 행위 자체의 재미나 희열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적절성을 전제한 종교적 바램과 기원은 과잉과 광기라는 부적절성에 의해 왜곡, 훼손된다. 제대로 믿는 자라면 이미 미친 자여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의 전제/한계를 붕괴시킬 만큼 믿는 자만이 윤리적 존재들이라는 주장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남성문화의 대상, 남성적 보기의 표상인 누드화를 그들과의 전쟁에서 약탈했음을 표식한 제목 《전리품 비너스》는 여성 작가로서의 이순종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순종이 약탈한 비너스에게는 ‘얼굴’이 없고, ‘여체’로 봤을 때는 과잉해석되어 있다, 희화화되어 있다. 침을 꽂기 전에 연필로 스케치한 비너스의 몸매는 여성의 실제 몸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그린 듯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수많은 침들이 무늬를 이루며 꽂혀 있다. 이순종이 약탈한 비너스는 일견 만화, 그래피티, 조잡한 키치에서 전유한 여체처럼 그려짐으로써 이 전쟁이 ‘웃긴’ 부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위문화에 의한 고급문화의 패러디는 진지한 위선자들을 실눈으로 바라본 자들의 전복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안에 웃음을 내포한다. 나는 결국 이순종의 저 많은 침들을 웃음과 연결지을만한 상상을 시작한다. 저렇게 많이 구멍이 나면, 저렇게 바깥에 시달리면 그 몸은 곧 중력을 잃고 뜰 것이다, 아니 날 것이다. 우리는 박장대소할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부레가 달린 물고기나 날개가 달린 새가 된다. 고전적인, 낡은 잔재인, 텅 빈 기호인,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숭배되는 형식인 산수화/풍경화/누드화가 숱한 침들의 침입으로 무장해제된다.

 이순종은 이미 “비무장지대”를 이렇게 사사화/주관화해두었다. “중력은 공간을 무장시킨다. 무중력의 공간에는 초점이 없다. 목적물이 없다. 그래서 무장이 해제된다. 비무장지대에는 사랑도 미움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없다. / 나에게 공간은 무장이 해제된 자유로움이다. 무장되기를 기다리는 그리움이다.”2)

 중력이 지배하는 무장지대와 달리, 이순종의 비무장지대, 무기가 침인 이 장소에는 중요한 것, 목적, 감정이 부재한다. 그러므로 거기엔 “주체”가 부재한다. 이순종은 그런 상태를 자유라고 부른다. 다시 무장하고 중력의 세계로의 귀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비무장지대는 틈으로써, 사건으로써 경험될 것이다. 전리품, 무장, 거룩함, 모순과 역설, 신비와 경이와 같은 다른 계열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이순종의 무대에서는 함께, 어지럽게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한 것이 되는 뒤섞임이 가능해지는 이 무대에서 말이 많아지고, 가벼워진다. 해명해야할 단어나 개념을 방치하고 건너뛰어도 될 것 같아서, 뒤에 내버려두고 옆으로 간다. 일견 찝찝하고 일견 무책임하고 일견 자유롭고 일견 웃기다.

 가사노동자이기도 한 이순종이 전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그릇은 자취생들을 위한, ‘천원의 행복’을 호언장담하는 다이소 가게의 그릇이다. 다이소에서 파는 저렴한 유리로 만든 밥그릇, 와인잔, 물컵 등이 신작인 《유리여래 입상》, 《유리여래반가상》, 《유리여래좌상》 등에 소재이자 오브제로 사용되었다. 다이소에서 파는 유리그릇에 ‘매혹된’ 이순종의 레디메이드 인용/차용은 저렴한 물건이면서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깨지고 부서질 수 있는 부엌의 그릇들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경험을 경유해서 일어난다. 여래(如來)는 부처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직역하면 “그렇게 오고 가는 분”, 의미론적으로는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의 여래는 ‘국중박’에서 신비한 자태로 국민을 맞이한 반가사유상에서 제일 먼 곳으로 내려와 인용/차용되었다. 국중박의 진품 반가사유상이 굿즈로 불티나게 팔리고, 마치 다이소의 물건들처럼 반복·복제된다는 아이러니가 다이소의 물건들로 미메시스된 이순종의 여래상의 키치스러움과 함께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는 물신이고 후자는 기호적 차용이고 오브제의 유희이다. 전자는 국가주의적 신화에 동원된 유물이고, 후자는 지금도 ‘그렇게 오고가는 분’일 부처의 낮고 맑고 명랑한 형상이다. 익명의 다국적 기업 노동(자들)의 유머인 듯, 이순종이 매혹된 다이소 그릇들은 모두 입술 부분에 꽃잎 모양의 장식/낭비/췌언이 붙어있다. 불필요한 부분을 빼지 않은, 대량으로 찍어낸 물건들이 주역인 ‘일상의 리듬/명랑’을 실눈으로 본 이순종의 여래상들은 인조 눈썹, 인조 머리카락, 심지어 인조 손톱도 ‘갖고’ 있다. 눈꺼풀에 내려앉을 싸구려 인조눈썹/손톱/머리카락과 민들레씨나 막 날리기 시작한 낱낱의 민들레 씨들이 연접한다. 여래는 여성이고, 싸구려 가짜 부분들을 단 위장-여성이고, 부레나 날개가 없어도 나르는 민들레씨이다. 오고감이 없이 오고가는 존재인 부처의 가벼움은 마침내 다이소 가게에서 걸맞는 이미지, 형상을 얻은 듯 싶다. 장난 같고 농담 같고 구현 같고 연습 같고 진짜 같다.

 시각 이미지와 실제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착시(optical illusion) 현상과 관련해서, 게슈탈트 심리학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오리 토끼 착시’나 ‘얼굴 꽃병’ 착시일 것이다. 동시에 두 개의 이미지를 보는 이, 모순과 역설을 즐기는 이는 시각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물론 착시는 보기의 순차성을 통해 불가능한 둘의 대치로 인한 시각의 교란을 피한 채로 보기의 즐거움을 유지한다. 착시에서는 오리와 토끼가 온전한 이미지로 겹쳐지는 상태, 얼굴과 꽃병이 온전한 채로 함께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니까. 그래서 오리의 부리로 보이는 것이 토끼의 이미지에서는 귀로 보이게 된다. 부분은 그것이 환원되어야 하는 전체/기호/개념에 의해 비로소 인지된다는 게 이러한 종합적 인지의 전제이다. 이순종의 작업을 착시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지배적 힘/권위를 갖는 장르나 개념, 도상을 일상적 오브제를 통해 수정하고 전복하는 작가의 방식이 위기로서의 모순/역설을 시각적 유희의 발판으로 떠안으려는 긍정, 명랑, 가벼움, 위탁과 관련이 있다는 나의 읽기에서는 굳이 착시를 끌어들여도 무방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주체로서의 주권성을 내려놓은 겸손과 수치심이 그 주체를 비무장지대로 이끈다.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박탈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즐기는 이들은 이미 인간의 눈과는 다른 눈으로 이 세계를 즐기게 된다. 그들은 다르게 본다. 눈 뜬 자들의 세상에서 실눈 뜨기를 잊지 않은 이들의 보기. 오리와 토끼, 혹은 비극과 희극, 혹은 우울과 유머......

 

 이순종의 위반은 분노나 거역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순종’의 자리는 치유와 함께, 부처와 함께 일어나는 위반과 거역을 상연하려는 자리이다. 이 유희, 가벼움과 명랑이 주역인 위반에서 우리는 여전히 믿는 자여야 하고, 그러므로 겸손하고 받아들이는 자여야 한다. 믿는 자는 기꺼이 속기로 약속한 자이다. 그의 믿는 체하기는 사로잡히고 숭배하기 위해서이다. 종교처럼 예술은 믿음과 배반이 공존하는 모순과 역설의 장이다. 이순종의 ‘배반’은 즐기기 위해, 웃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 일어난다. 이순종은 우상파타를 꾀하는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세속에서 빌려온 것들을 갖고 이순종은 ‘그들’의 세계관을 보충한다. 이순종의 여성은 안에서 부역하는 자이고, 동시에 그 부역 속에서 모르게 즐기는 자이다. 즐기는 자, 모순과 역설을 보는 자는 부정의한 세상에서 계속 사는 자이고, 이들의 미적 주권성은 이들의 순종, 체하기, 유희를 통해, 실눈으로, 뒤쪽에서, 아래에서 행사될 뿐이다.

이것은 계속 동의하지 않은 세상에서, 힘겨운 세상에서 함몰되지 않고 살려다가 만들어진 처세술,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일찍이 이순종은 고단한 유학생활이 “세상을 농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술회했다. 농담은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이들이 힘든 세상을 ‘신포도’로 만드는, ‘가벼운’ 텍스트로 만드는 전술이다. 뜬 눈으로 감시하는 자들의 세계에서 농담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비겁한 장치이다. 폭력적인/비극적인 세계를 웃긴 것으로 전치시킴으로써,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 가게’처럼 만듦으로써,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즐기는 방식이다(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인 귀도는 유대인 수용소를 어린 아들 조슈아에게 놀이터로 선물한다. 주인공 역을 맡은 본 영화의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흥미로운 모험극처럼 변주해서 수용소의 비극을 감춘 아버지의 이야기-짜기(픽션화)에서 이 영화의 구조를 차용했다고 했다. 재현불가능한 비극으로서의 아우슈비츠는 아버지와의 게임을 즐기는 아들의 무지와 천진난만함에 묻어서 슬쩍슬쩍 드러날 뿐이다. 우리는 비극의 실재를 희극이란 스크린을 통해 견디거나 즐기거나 가끔 웃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근대적)주체의 폭력이 능력으로 공표되는 무대에서 뜬 눈으로 비극을 겪거나 실눈으로 희극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필사한 이순종의 문장은 이렇다. “현실에 대한 발언을 현실적으로 안 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교란시키면서 엿보면서 깔깔댄다. 들어갔다 나온다. 동의를 구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섹시하지 않다. 사이에 있는 게 좋다. 그때 느끼는 오롯한 나만의 지점을 즐긴다. 나는 싸우거나 저항하는 타입이 아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재미있어 하는 부류이다. 비겁한 것 아닌가, 의심도 한다. 지금 보니 그게 내 방식이었고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부분으로 이제 나는 종이에 먹, 호분을 사용해서 그린 유사-한국화의 여인들을 본다. 《구멍》은 말 그대로 착시의 구조(형식)를 그대로 갖다 쓴 작품이다. 이순종의 ‘여인들’ 중 하나인 길게 땋은 머리를 한, 너무 많아서 곧 목을 조일 것 같이 많이 그려진 머리카락을 한 여인의 프로필이 대칭 형태로 그려졌고, 모자를 쓴 듯 한 이 여인 형상의 두 눈은 이 프로필 여성의 머리 위에 그려진 광배(光背)가 도맡고, 여성의 놀라서 벌린 듯 한 입은 다이소 유리그릇의 입술 부분을 차지한 무늬/췌언이 가장자리를 장식한 거울이 차지하고...... 그래서 일견 ‘놀란’ 여인으로 보이는 이 형상, 속이기와 위장하기와 빨아들이기의 장소인바 여성-구멍의 형상 때문에, 이순종의 유사-한국화가 게슈탈트 심리학의 착시를 흉내내면서 가부장제 구조 안 여성의 ‘부정적인’ 자리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누드화의 죽은 듯, 이쪽의 남자들이 욕망하는 거세된 타자(에 대한 공포)를 연기하는 여자와 달리, 이순종의 여자는 이미 놀라고 사건에 빠져 있고 즐기고 있다. 성스러움과 세속의 욕망, 속이는 이미지와 명백한 기호 사이에서 내가 뭐로 보이니, 라면서 이미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양구의 불탄 숲에서 갖고 온 검게 탄 나무를 본다. 동시에 나는 이것은 안-본다. 아직 실눈은 안 뜰 것이다. 화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즐긴’ 여성으로서, 이순종이 주워온 이 ‘사물’, 불이 났었음을 흔적으로 함축한,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사물-오브제를 아직 나는 읽지 못한다. 이것을 한의원의 침과 다이소의 유리그릇과 같은 오브제로 평등하게 대우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른다. 그래야할 것 같지만, 그것은 나의 내공으로는 아직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이순종의 눈이라면 세속의 풍경은 포르노일 것이다. 즐길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계속 즐기기 위해서는 포르노라는 장치/프레임이 필수적이다.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실눈을 뜰 수 있다면, 도덕과 양심, 감정을 갖지 않은 채 즐기려는 지독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보기가 포르노적이라는 데 대해 거리낌이 없다면,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려는 강박/도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실험, 내기에 걸겠다는 결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명랑이나 웃김이나 가벼움으로 한 세상을 횡단하는, 일종의 어떤 가령 말하자면 그러므로 ......

1) 이순종, <이순종 도록>, 토탈미술관, 2020, pp.166에서 부분부분 인용한 것들이다. 

2) 이순종, 앞의 책, p.18(2004년 전시 <공간>의 서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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