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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찬효 : “경계에 살다”

 

 

 

김홍희(전 서울시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하나의 문맥을 완전히 통달하기는 영원히 불가능한 까닭에 우리는 “리빙 온 living on”에서 “온on”의 의미를 결코 터득하지 못한다. 그 애매모호함을 결코 파악할 수 없기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리빙 온”은 유예, 또는 사후, 생 이후의 생, 또는 죽음 후의 생, 더 많은 생 또는 생 이상의 생, 그리고 더 좋은 생을 의미할 수 있다 ; 끝없이반복되는 부유 상태, 그 부유 상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생의 승리는 생을 초월하는 승리로, 그것은 생을 규정하는 모든 소유격의 행렬을역전시킨다.[1]  

데리다 “Living on - Border Lines ”, 가운데 

 1.들어가며 : “되어보기”의 정치학 

배찬효는 영국에 거주하며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대미술 작가이다. 한국화단에서는 다소 생소한 편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독자적 작품세계로 정평을 얻고 있는 유망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의 독자성은 작가 자신이 “여장남자 MTF crossdresser”로 출연하는 일탈적 사진 이미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낯설고 불편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잊혀지지 않는 잔상과 여운을 남긴다.      

그러면 낯설고 불편한 그 일탈적 이미지의 실체와 의미는 무엇인가 ? 배찬효는 미지와 동경의 세계인 서구 유럽 영국에 유학하면서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이주, 환치, 소외의 경험과, 언어와 정체성의 혼란을 이성의 복장을 착용하는 “크로스드레싱”의 방식을 빌어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기획, 연출, 제작을 맡은 작가가 카메라 앞에서 영국 귀부인이나 왕가 인물들, 동화 주인공과 마녀들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한국인으로서 “영국인 되어보기”, 남자로서 “여자 되어보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배찬효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위반적인 “되어보기” 정치학의 메세지를 직설적인 발언 대신에 묵시록적 계시와 같은 은밀한 시각 언어로 전달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사진은 진실에 내재된 허구와 모순을 은유적으로 들춰내는 알레고리 수사학이자, 문명의 폭력을 침묵으로 노출하는 은폐적 위장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구사하는 은밀한 언어가 내용과 양식의 이중성, 그리고 그에 의거하는 양면가치 또는 애매모호함의 미학으로 대변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 그의 사진이 고전주의 회화의 정적 구조 속에 바로크 예술의 연극적 아우라를 발산하며 고요함과 동요를 혼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양식적으로는 고전주의와 바로크, 장르적으로는 회화와 연극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시제적으로도 차용, 은유, 혼성모방의 전략을 통해 고전적 상징성을 현대적 “포스트모던 알레고리”로 재생산하는 맥락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고 볼 수 있다.[2]

 

고전과 바로크, 회화와 연극,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고요함과 동요가 병발되는 “데두블러망 dedoublement” (분리봉합)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건의 시공적 맥락을 붕괴시키고 내러티브의 흐름을 파괴시키는 내파적 인자로 작용하면서 그의 작업에 탈경계적, 탈맥락적 특징을 부여한다. 실로 우리는 단순하고 명료하고 안정적인 단일성 보다는, 복잡하고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양면성에 현혹된다. 그것은 이분법적 질서보다 탈경계적 위반이 초래하는 상상과 환상이 

뜻하지 않은 인식론적, 미학적 소격 효과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를 예증하는 배찬효의 데두블러망 수사학, 또는 양가성의 미학은 유행 사조나 개인 취향으로 의도된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 자신이 처한 타자적 환경과 정체성에 관한 실존적 질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존재와 삶의 애매모호성, 사고와 우연성, 차연적 부유성, 사후까지 존속하는 유예성을 직시하는 쟈크 데리다의 철학적 비전에 동조하듯이, 배찬효는 동양/서양, 과거/현재, 남성/여성이 분리되는 동시에 공존하는 이중주체로서 비고정적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양, 과거, 여성 등, 자신과 무관한 “타인 되어보기”를 유희한다. 여장남자로 수행되는 “되어보기” 놀이를 통해 시공간을 거스르며 영국의 역사적 사건과 서사에 개입하고, 크게는 중심과 원칙을 해체하여 주류 담론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로 타자의 입장에서 행해지는 “되어보기”는 생성적 변화를 위한 일탈과 전복의 행위로, 이를 통해 그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축된 역사적 대서사를 개인적 소서사로, 타자의 이야기로 치환시킨다. 이와 함께 서구 문명사에 도전하는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성찰하는 비판적이고 시의적인 현대작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2. <자화상>

 

배찬효의  사진작업은 “복장 속의 존재 Existing in Costume” 라는 제하에 크게 4개 시리즈로 구성된다. 2005 ~2007년의 <자화상>, 2008~2010년의 <동화책>, 2011~2012년의 <형벌>, 2013 ~2016년의 <마녀사냥>이 그것이다. 

처음으로 “복장 속의 존재”라는 제목을 달고 탄생하여 이후 시리즈 작업의 동기적 물꼬를 터주게 되는 <자화상>은 그러한 만큼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축으로 작용한다. 복장 속의 존재라는 화두가 암시하듯이, 작가는 전 작업에 걸쳐 여성의 복장을 입은 알타에고로서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과의 동일화를 꾀한다.그러나 그러한 동일화가 성적 차이와 문화적 차별의 딜렘마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에고와 알타에고의 경계에서 동일화와 차별화를 거듭하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자신 존재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진 속 인물 모두가 자전적 암시를 내포하는 배찬효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화상> 작업은 특정 인물을 대상화한 초상화가 아니라, 13세기-19세기 영국에서 시대적 스타일로 유행하던 옷을 작가 자신이 입고 찍은 “시뮬라크르 simulacra” 자화상, 또는 그러한 의상을 입었을 당시 영국 여자들의 가상적 인물화이다. 엄밀히 말해 이 사진은 인물보다는 옷, 그가 영국 국립 극단이나 영화제작사를 찾아 다니며 어렵사리 구한 화려하고 품위있는 고전 복장이 주인공이고, 인물은 단지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모델이 된 작가는 특정 시대의 문화적 기표인 패션, 그 패션의 향수자였던 동시대 상류층 여성으로 변신하였으나, 남의 옷, 지난 시대 여성의 옷을 입은 탓인지 성적으로 모호하고 부자연스럽고 기이해 보인다. 더구나 무표정한 얼굴에 뻣뻣한 자세가 고립되고 초월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이것이 “복장 속의 존재”에 등장하는 모든 여장남자의 전형적 스타일이 된다. 

 

그런데 이 <자화상>속 인물은, 짙은 화장에 예복과 장신구로 과도하게 치장한 모습에서, 또한 특정 여성의 페르소나를 “코스프레”하는 점에서, 단순히 여자 옷을 입은 “크로스드레서”라기 보다는 과장되고 과시적이며 퍼포머티브한 여장남자, 소위 “드래그 퀸 drag queen”으로 판독된다. 개인의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지난 시대의 영국 여자를 연기하는 연극적 행위로 예술을 한다는 맥락에서 배찬효는, 구태여 명명한다면, “예술적 드래그 퀸”, 또는 “연극적 드래그 퀸”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여장남자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닌 다른 성”으로 시각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한다면, 작가의 그/그녀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관련되는 “퀴어 queer”나 “이성복장도착증”을 의미하는 “트랜스베스티즘 transvestism”에 대한 관심보다는, 남녀 이분법만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제3의 성”, “또 하나의 성”에 대한 젠더 정치학적 표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컨대 배찬효의 “드래그 퀸 코스프레”는 차이가 차별이 되는 서구문화, 남성중심의 젠더 구조에 대한 작가적, 예술적 도전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젠더 의식이 영국 속 한국인으로서의 소외를 절감하는 개인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점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친구를 사귀거나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에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타자에 대한 매력의 수치에 대하여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고백적 진술은, 그의 여장남자가 소외된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은, 여자건 남자건 또는 제3의 성이건 단지 그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적 사람이기를 원했던 타자적, 실존적 욕망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배찬효의 자기애적 욕망은 자신의 예술이 특정 미학적 기준을 충족시키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작가적 완벽주의 – 이는 빈틈없는 장면 연출, 의상과 소도구 선택, 액팅의 몰입도 등을 통해 감지된다 – 와도 직결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작가적 나르시즘은 여장남자로서 

성 정체성, 민족 정체성을 위반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결국 <자화상>으로 출발한 그의 “복장속의 존재”는 서양 속 동양인으로서 소외의 공포를 체감하게 된 한 젊은 남성 작가의 나르시즘과 탈나르시즘의 혼재와 간극을 보여준다.

3. <동화책>, <형벌>, <마녀 사냥>

 

<자화상>으로 출발한 “복장 속의 존재” 는 나르시즘과 탈나르시즘, 동일화와 차별화, 동화와 이화의 양축을 왕래하는 타자적 이중심리 행로로 진행된다. 가상의 인물을 재현한 <자화상>과 달리, 후속 시리즈들은 구체적 사건이나 전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자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향수”를 담은 사적 내러티브라면, 후자는 소외와 환치의 개인적 경험이 종래는 서구중심적 거대 담론의 산물이자 사회문화적 편견이라는 점을 자각한 작가의 문명비판적 진술이다. 

 

대표적 거대담론인 역사는 시대적 필요와 권력의 당위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술되고 편집되는 사회문화적 구축물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재현과 젠더는 지배이념의 일차적 효과로서 사회적 제관계에 의해 생산되는 복합적이고 비고정적 담론이다. 역사적 서술의 파생물이자 재현과 젠더의 모방적 반영인 동화나 전설 역시 알레고리로 재구성되는 수사학적 형성물이다. 인간 소외감의 근원을 교육으로 전수되는 역사적 왜곡과 문화적 편견에서 발견하는 작가는 역사를 재기술하려는 의지로 자신만의 사진 <동화책>을 만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부계적 젠더 개념을 추종하듯, 미천한 신분이지만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 왕자와 같이 힘있는 남성을통해 행복과 꿈을 실현하는 나약하고 의존적인 어린 여자로 유형화된다.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라푼젤, 백조의 호수, 개구리 왕자, 잠자는 공주의주인공들 역시 가부장제도가 생산한 여성성과 여성상의 화신이자, 가부장제를 굳건히 떠받드는 착한 여자 이데올로기, 예쁜 여자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그러나 배찬효의 <동화책>에 출연하는 이 여주인공들은 공주와 미녀의 재현적 유형과 거리가 먼, 평범한 외모에 <자화상>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무표정한 성인 여자의 모습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응축된 장면을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구체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과 맥락이 단절된다. 브레히트 서사극을 방불케하는 뜻밖의 소외 효과로 그는 친숙한 동화를 낯설게 하고 재래 동화의 미덕과 재현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형벌> 프로젝트는 역사적, 철학적, 과학적, 문화적 담론의 오류란 원천적으로 타자에게 억압과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본성적 권력 의지와 지배 욕망에 의해 형성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권력의 메커니즘, 지배와 피지배의 작동에 대한 관심에서 왕, 왕녀, 여왕, 귀족, 사제 등 영국 역사 속 남녀 권력자들을 대상으로 그들간의 대립과 투쟁과 처형의 사건을 추적하고 그것을 장면 연출로 작품화 한다. 권력과 맞닿아 있는 형벌을 주제화함으로써 그는 크게는 군주 전제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고취하고, 작게는 서양 속 동양인으로서 언어와 문화 습득을 통해 “서양인 되어보기”의 꿈을 꾸지만 결국은 시지프스적 좌절로 고통받는 자신의 실존적 모순과 그에 따르는 정서적 컴플렉스를 자성한다. 

 

<형벌> 프로젝트에는 16-17세기 영국 왕정의 헨리8세, 챨스1세를 비롯한 4인의 남성의 권력자들과 함께 왕녀 앤 볼린, 여왕 매리 스튜어트 등 2명의 여성 권력자가 등장한다. 이 여성들은 <동화책>에 나오는 “페미닌”한 여성이나 마녀와 같은 “팜므 파탈”형 여성과는 전혀 범주가 다른 남근적 권력의 소유자들로 왕관을 쓰거나 왕좌에 앉아 위엄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전 시리즈의 여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부자연스럽고 고립된 모습으로, 의상이나 소도구의 힌트를 제외하면 동 시리즈의 남자들과도 별반 차이 없는 중성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남자, 여자가 아니라 권력자, 피억압자의 구분만이 강조된 이 작업에서 작가는 권력은 젠더와 무관하게 남성적으로묘사되는 재현의 법칙을 강조하는 듯 하다. 배찬효는 여기서 처음으로 남자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지만, 이는 남자 되어보기라기 보다는 “권력자 되어보기”로서, 이를 통해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타자적 위치에서 그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서구 문명과 역사적 서사에 대한 총제적 반성과 성찰은 <마녀 사냥>이라는 좀더 극단적이고 광기어린 사건을 주제화함으로써 극대화된다. 일종의 형벌, 저주로 낙인되는 <마녀 사냥>의 공포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해지고 합법화된 질서로 정당화되는 폭력적 억압에 기인한다. 마녀와 악마를 동일시하는 초월적 믿음, 종교적 신념, 과학적 확신에 의거하여 마녀를 사악한 여자, 추방되어야 할 금기적 타자로 규정한 재현과 젠더의 이데올로기는 식민시대가 끝난 후에도 존속하는 신식민주의적 인종 차별과 젠더 불평등으로 이어지며 고발과 해체의 대상이 된다.  

 

<마녀 사냥>은 마녀의 죄목을 암시하는 묘사적인 6개의 장면들과, 칼 해골 등 소품들을 들고 있는 마녀 초상화 4점으로 구성된다. 전자에서는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와 계약한 죄,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 죄 등 마녀의 죄목을 시각화하는 행위가 묘사되고, 후자에는 마녀의 소행을 암시하는 여러 소도구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마녀 이야기나 마녀의 상투적 모습과 동떨어진, 자신의 전형적 여장남자로 묘사되고 있다. 맥락을 무화시키는 이러한 재현 방식을 통해 작가는 마녀가 화형 되어야 할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죄목”이 씌워진 범죄자, 사회적 약자, 문화적 타자라는 점을 노출하고자 한다. 이는 중세 당시에는 여장남자보다는 남장여자가 터부시되어 바지만 입어도 마녀라는 낙인으로 화형 되었고, 근대 이후 마초이즘 등장으로 오히려 여장남자가 배척되었던 시대적 오류와 문화사회적 편견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4. 새로운 유형의 여성성/여성상 

 

배찬효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크로스드레싱”이라는 의미론적 설정 이외에도 기이한 도상으로 주목을 끈다. 그 인물은 서구 여성 초상화의 관례가 된 우아하고 달콤한 로코코 스타일의 규범을 깨고 무미건조한 표정과 냉랭한 부동의 자세로 관객과의 거리를 취하고 있다. 인체모형 같이 생동감이 결핍된 그 인물들은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고 여성적 부드러움이 배제된 마네의 <올렝피아>를 연상시킨다. 특히 관객을 향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올렝피아>와 같이, 배찬효

의 여주인공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주체로서 관객을 향해 당당하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그 시선은 19세기말 파리의 세속적 여인의 도발보다는 시공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의 고립과 절제를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초월적이고 고립된 배찬효 인물의 특성은 작가의 세심하고도 전략적인 장면 연출로 그 효과가 배가 된다. 배찬효는 형상과 배경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고전 회화의 원칙을 준수하듯이, 중앙에 인물을 정면 배치하고, 배경을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장면 셋팅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그 장면은 실제 장소에서 현장 촬영한 사실적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연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듯한 비현실적 환상을 연출한다. 장엄한 고전 건축 외부, 화려한 왕실 내부, 은밀한 숲속 등 자연적 “장

소”들이 그의 손에서 현실을 떠난 미지의 공간, 내러티브를 탈맥락화시키는 허구적 “공간”으로 재구성, 재탄생되는 것이다. 

“장소”의 “공간”으로의 치환이라는 맥락에서 그의 장면은 “일상 생활의 창조적 실천성”을 역설한 미셀 드 세르토의 이론을 환기시킨다. 그의 이론을 배찬효의 작품에 대입시키면, 자연적 장소는 문법적 언어인 “랑그 langue ”에, 미지의 연극적 공간은 실천적인 일상언어, 즉 “파롤parole”에 비견될 수 있다.[3] 랑그적 질서, 규칙, 안정성 대신에, 일상적 삶의 애매모호함, 우연, 사고, 예측불가능성이 포착되는 파롤의 공간은 바로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배찬효의 예술이 꽃피우는 “창조적 실천”의 공간이다. 

 

작가는 장소를 공간화하는 이러한 연극적 미장센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피사체 인물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화상> 에서 두드러지듯이, 작가는 그러한 의도로 사진 배경을 이루는 자연풍경과 건축물의 포커스를 흐리거나 아예 형상이 배제된 검은 추상 색면을 구사한다. 배경이 내러티브 전달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이후의 시리즈들에서도 연극적 조명 효과로 주인공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배경을 뒤로하고 부각되는 그 인물은 다름아닌 새하얀 백인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동

양적 용모의 여장남자, 분장하지 않은 자신의 손을 의도적으로 노출한 채 부동적인 자세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낯설고 불편한 모습의 배찬효이다. 

 

여장남자로 가장한 배찬효의 자화상은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의 나를 바라 보려는” 자의식적 성찰의 매개물이다. 동화되기를 원하면서도 동화될 수 없는 문화적 소외자의 분노, 정체성이 실종된 이방인의 고뇌를 일탈된 자화상으로 항변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자화상은 자신과 동일화되는 여성, 거울 속에 반영되는 여성적 알타에고로 개념화된다. 그러나 이 나르시서스의 여성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또 하나의 다른 성일 뿐이다. 작가는 이러한 성적 재현을 통해 생리학적으로 규정된 본질적 여성을 부정하고 문화적 구축물로서의 여성, 즉 섹스보다는 젠더로서의 여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화상>에서는 왕년의 유행 복장을 입은 행복한 영국 귀부인을, <동화책>에서는 순종적인 착한 여자를, <형벌>에서는 권력적 여성을, <마녀사냥>에서는 치명적 여자를 코스프레하는 “드래그 퀸”이 되어 그는 여성을 추방적/부정적 여성과 처방적/긍정적 유형으로 이분화하는 부계적 젠더 구조에 개입하는 것이다. 

 

배찬효는 자신의 여성 주인공들을 추방/처방, 부정/긍정의 이분법으로 범주화될 수 없는 여장남자로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여장남자는 과장적 “드래그 퀸”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배찬효 특유의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즉 구체적, 사실적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그래서 “하이퍼리얼”한 이 존재는 마치 젠더 자체로부터 해방된 무젠더, 탈젠더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페미니즘 주체, 또는 미래의 여성상을 형상화하는 듯한 이러한 재현을 통해 그는 프랑스 네오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하는 “새로 태어난 여성 La Jeune nee”, 또는 영미권 여성중심론자들이 말하는 오이디프스 이전 단계의 원초적 여성과도 같은 새로운 유형의 여성성과 여성상을 제안하는 것이 아닐까?

 

 

 

5. 여성/동양성/환상성의 반란

 

배찬효에게 여성은 남성의 대상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시되는 타자적 주체, 동시에 자신이 되고자 하는 미래의 성, 즉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닌 다른 성” 과 등가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영국 귀부인을 가장한 <자화상>에 대해 “나는 영국인이 되려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화장을 하고, 엄마가 되기 위한 그 시도를 나는 하려고 한다”고 작가 노트에 적고 있다. “영국인 되어보기”는 “영국 여성 되어보기”로, 그것은 “엄마 되어보기”로 이행되는 것이다. 

엄마와의 동일화는 쟈크 라캉이 “상징계 Symbolic Order”라 부르는 부계적 언어, 질서, 재현, 문화의 영역으로 진입하기를 거부하고 이미지, 반영, 상상, 자연의 영역인 모성적 “상상계 Imaginary Order”에 머물기를 원하는 유아적 욕망, 즉 유아발달 초기단계인 “거울국면 Mirror Stage ”의 심리

적 환상을 대변한다.[4] 이것이 남근적 특권과 가치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배찬효의 “엄마 되어보기”의 정치적 의미와 페미니즘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동양인의 소외를 절감하는 그에게 동양은 여성과 같은 타자로, 여성은 동양의 메타포로 각인된다. 서구인에게 동양은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 암흑과 같은 미지의 존재로,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억압되고 지배되어야 할 대상이다. 동양을 지배하는 유럽적 권력과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욕망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시각은 이미 인종, 젠더, 이데올로기의 상관 관계를 분석하며 동서양 관계를 지배/피지배, 중심/주변의 식민담론으로 풀이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에 기반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의해 실천적으로 옹호되고 있다.   

 

피식민적 여성과 동양이 환상성 Fantasy 담론과 결부될 때에 배찬효 예술의 페미니즘 함의가 한층 강화된다. 환상성 문예이론을 정립한 츠베탕 토도로프에 의하면, 환상은 현실/초현실 경계가 애매모호할 때 발생하며 아직 설명할 수는 없으나 경계에 있는 만큼 매혹적이고 위협적이며 질문하게 만든다. 또 환상은 보이지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즉 내부를 드러냄으로써 중심을 동요하게 만드는 전복적 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또한 역사의 말해지지 않는 부분, 침묵 당하고 은폐되고 부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온 것을 추적하고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하려는 특징을 갖는다.[5]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환상은 결국 배찬효 예술이 비판하는 문화적, 지역적, 젠더적 편견에 대한  인식론적 위협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서구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허구의 동양성을 해체하는 내파적 에너지, 비합법적 에너지로 충만한 무의식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라캉의 유아적 환상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벗어난 모계적 반란을 대변한다. 다시 말해 서구적 시각으로 대상화된 동양이 장기간의 침묵을 깨고 발화하는 역오리엔탈리즘 발상을 촉구하고. 가부장제의 여성이 닫힌 언어의 공간에서 비언어적인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유토피안 여성 창생을 가능케 하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환상은 서사적 여성미술 장르나 정치적 페미니즘 장르로 유효하며, 미지와 암흑의 세계, 피지배의 대륙으로 대변되는 아시아를 대상화하는 동양장르로도 잠재력을 갖는다.  

 

요컨대 배찬효의 “복장속의 존재”는 자신이 여성과 같은 하위주체, 식민대상인 동양인으로 자리 매김된 타자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그것을 치외법권적 환상의 궐기로 부정하는 자아 추적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배찬효의 예술이 서구를 상대화하고 국가, 민족, 인종, 젠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비서구 여성 창작 주체로서의 입장을 정치화하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6. “맨 트러블”/“젠더 트러블”의 증상 

 

배찬효는 페미니스트인가? 여장남성으로 여성을 재현하거나 주제화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작업방향이나 작가진술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적어도 포스트 모더니스트로서 페미니즘에 상당한 공감 내지 연대의식을 갖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실존적, 문화적 소외를 경험한 서구 속 동양인으로서, 서구문명의 전제를 의심하고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서구를 상대화하며 문화적 다양성, 지역성, 타자성을 강조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에 경도된 그에게 페미니즘 역시 하나의 비판적 지성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은 현대지성을 대변할 뿐 아니라 서로를 요구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동조적인 사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상은 서구 담론과 가부장제 체계를 불신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이해가 부합될 뿐 아니라 타자, 젠더, 재현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개념이 두 담론을 결합시키는 동기를 부여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타자로서의 여성, 재현과 젠더로서의 여성 주체가 빠질 수 없고, 페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해체주의 방법론에 기반하여 타자, 재현, 젠더를 재정의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요컨대 현대 인문학 뿐 아니라 페미니즘 비평에서도 새로운 분석의 범주로 부상하고 있는 타자, 재현, 젠더가 다양한 제담론을 생산, 순환, 소비시키는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의미있는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포스트모던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복합학문적 담론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변 철학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여성의 해방적 정치 담론인 페미니즘은 복잡한 남녀관계와도 같이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으로 얽히게 된다. 이러한 원천적 딜렘마가 배찬효와 같이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남성들까지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중적 입장을 취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적 정체성, 고정적 젠더를 신뢰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작가나 이론가들은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부계적 질서의 희생물이라는 인식하에서 “맨 트러블”, 그리고 성 정체성의 문제를 남녀 공통의 화두로 잇슈화한 “젠더 트러블”을 인식하며 페미니즘 비평에 합류하고 있다. 매튜 바니Mattew Barney, 폴 맥카시Paul McCarth, 마이크 켈리Mike Kelly, 찰스 레이Charles Ray 등 포스트신체미술가들의 작품이 예증하듯이, 동성애, 양성, 중성, 성전환, 복장도착 등으로 표출되는 “포스트휴먼”의 젠더 트러블 자체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최대 화두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찬효의 작품에 드러나는 맨 트러블, 젠더 트러블의 증상, 즉 타자적 남성으로 사는 실존적 억압,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닌 다른 성”을 향한 탈젠더 환상을 어떻게 독해할 수 있을까 ? 필자는 동성애 정치학 보다는 남성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작가의 여장남자가 단지 예술적 창안물인지, 아니면 퀴어적 감수성의 간접적 표현인지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동성애 정치학을 거론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 때문인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은유적이고 은폐적인 그의 양면가치 미학의 스펙트럼을 증폭시킨다.   

어쨋거나 배찬효의 작업을 남성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드려다 보려는 시도는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적어도 그는 여성을 타자적 하위주체로 간주하는 부계적 담론에 맞서 젠더와 재현으로서의 여성을 인식하고 나아가 제로 상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제안하는 점에서 페미니즘 비평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과연 남성 페미니즘이 가능한 것이지,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가 무엇인지 잠시 짚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7. 나오며 : 남성 페미니즘의 가능성과 한계 

 

남성은 제1의 성으로 젠더 구축에서 자유롭고, 부계사회의 피억압자라는 사실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페미니즘 이론을 수용하거나 차용하는 경우, 젠더적 모순에 봉착하고 그에 따른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실존적 경험, 성적 표현에서 남녀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과 같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없다는 결정론적 입장에서 보면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옷을 입은 구식의 여성혐오자“로 공격받을 수 있다.[6] 그러나 페미니즘은 여성경험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그 이상의 것이다. 

 

페미니즘이 양 성간의 권력 관계를 분석하고 남성우월을 보장하는 가부장제도를 변화, 해체하고자 하는 성의 정치학이라는 점에서 보면 페미니즘에 젠더적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립이 가능하다.  일레인 쇼왈터Elaine Showalter, 린다 카우프만 Linda Kauffman, 토리 모이Toril Moi 와 같은 젠더 이론가들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남성”을 상정하며,[7] 남성페미니스트는 여성 페미니즘의 모방적 추종보다는 남성성, 남성젠더 분석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을 권장한다. 남성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남성성을 축소, 무화시킨다는 위기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남성은 이론과 개념, 여성은 경험과 몸이라는 뿌리깊은 이분법적 대립을 청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염되지 않는 제로상태의 젠더에서 출발하여 남성, 여성간 상호작용을 전략화하고 서로를 후원함으로써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만을 위한” 단일 성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 남성학, 게이연구, 페미니즘 비평이 각기 다른 접근을 하지만 이들의 협업적 노력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이 지탄하는 가부장제의 전제들을 해체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에 비추어 볼 때 배찬효는 서구 문명과 담론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던 작가로서 토릴 모이가 말하는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남성”으로서의 정서적 자질과 인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를 남성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페미니스트이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유러피안 드림을 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불안정한 정체성의 위험과 매혹을 경험하고, 자아, 생존, 실존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성찰을 심화시켜가며 자신 고유의 역전적, 전복적 어휘를 발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끝으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배찬효의 “복장속의 존재”가 주체의 상호주관성과 실존의 애매모호성을 암시하는 데리다의 “경계선상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그것이 즉각 여성과 여성의 문제, 나아가 페미니즘으로 환원된다는 전제에서 본 글의 논의가 출발했다는 점이다. 실로 경계선상의 존재는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의 존재, 애매모호한 이중 주체로서 자율적이고 사적인 “평등의 공간”이 아니라, 불평등한 제반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타율적이고 공적인 “차이의 공간”에서 생존한다. 차이는 이방인에게 억압이며, 그가 여성인 경우에는 인종민족적 차이에 덧붙여 성적 차이가 이중 억압으로 작용한다. 

 

배찬효는 복장전도된 여자가 됨으로써 배가된 억압의 무게로 자신의 정체성을 통찰한다. 자신을 알고 싶은 욕망에서 그는 동서양의 지역적 차이, 현재와 과거의 시제적 차이, 남녀의 성적 차이의 공간에 용감하게 진입한다.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 사회, 경제적 힘과 의미에 비대칭적으로 위치시키는 사회적 구조로 이해 되어야 한다”는 해체주의 페미니즘의 구호를 대변하듯이[8], 그는 “복장속의 존재”라는 일탈적이고 위반적인 작업을 통해 그러한 차이를 시각화하고 그 오류를 노출하는 것이다. 

 

[1] Derrida, “Living on - Border Lines ”, pp.76-77, Harold Bloom et al., eds., Deconstrucion and Criticism, London : Routledge & Kegal Paul, 1978,          pp. 75-176. 본 글의 제목 “경계에 살다”는 데리다의 동 에세이 제목 “Living on - Border Lines”를 인용한 것이다. 이를 “경계선상에 존재하기”로 직역하.      기 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가벼운 “경계에 살다”로 의역하였다. 

    [Forever unable to saturate a context, what reading will ever master the “on” of living on? For we have not exhausted its ambiguity….. (e.g. living on     can mean a reprieve or an after life,”life after life,” or life after death, more life or more than life, and better; the state of suspension in which it’s over     – and over again, and you’ll never have done with that suspension itself) and the triumph of life can also triumph over life and reverse the procession     of the genitive.] 

[2] 포스토모던 알레고리에 대하여 Craig Owens, "The Allegorical Impulse: Toward a Theory of Postmodernism," in Chantal Pontbriand ed., Performance      Text(e)s & Documents (Monteal: Parachute, 1981), p. 37-47 참조.

[3]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1984), Nick Kaye, Site-Specific Art: performance, place, documenta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p. 3-12. 

[4] Madan Sarup <Postmodernism and Poststructuralism>, Athens: The University of Geogia Press, 1989, pp. 25-29.

[5] 츠베탕 토도로프 Tzventan Todorove (1939-2017), <환상성: 문학장르에 대한 구조적 연구, The Fantastic: A Structural Approach to a Literary.                Genre>1973 ; 로지 잭슨 Rosemary Jackson, <환상성-전복의 문학 Fantasy – The Literature of Subversion> 문학동네, 2001 참조

[6] Elaine Showalter, “Inroduction: The Rise of Gender”, Elaine Showalter ed., Speaking of Gender , Routledge 1989, p.7. 

[7] Toril Moi “Men Against Patriarchy”, Linda Kauffman ed., Gender & Theory , Basil Blackwell, 1989, pp.181-188. [old misogyny dressed up in                Woolf’s clothing]

[8] Griselda Pollock, "Modernity and Spaces of Femininity", <Vision & Difference: Femininity, Feminism and the History of Art> London & New York:      Routelege, 1988, p. 56.